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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요충지 크림반도에서 한반도를 본다-김동석

by kace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이탈리아.일본등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영.소 연합국 수장들이 크림반도 남쪽 끝의 얄타에 모였다. 1945년 2월4일부터 11일까지의 얄타회담이다. 종전 이후 패전국 처리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서구 열강과 유라시아가 서로 패권을 두고 다투던 크림반도에서 2차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역사적 회담이다. 이 얄타회담은 우리와도 무관치 않다. 이 자리에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신탁통치안을 거론했다. 40년 신탁을 거론했다가 5년으로 줄였다. 태평양전쟁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대 일본 항전에 소련을 이끌어 내려고 사할린과 일본 북방 영토(쿠릴열도)의 소련지배도 인정했다.

19세기 중반엔 영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러시아가 붙은 전쟁이 일어났다. 크림반도와 흑해를 서로 차지하려는 크림전쟁이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해 흑해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내려놓고 크림반도에서 물러났다. 백의의 천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이팅게일이 이 전쟁에 파견된 영국군 간호사였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도 조국 러시아를 위해서 참전했던 전쟁이다. 필자가 문학청년임을 자처하던 20대 초반 때 가장 열광했던 작가가 러시아의 ‘안톤 체홉’이었고 그의 출생지 크림반도는 필자가 한번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살았던 후르시쵸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1954년 크림반도를 양국(러시아와 우크라이나)우호의 상징으로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소련체제가 붕괴되면서 러이사와 우크라이나 간에 크림반도 소유권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반환을 요구했고 우크라이나는 합법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맞섰다. 1991년 크림 자치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충돌이 완화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크림자치공화국 의회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등 갈등의 불씨가 여전했다. 우크라이나와 크림자치공화국간의 갈등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갈등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크림 분리 독립사태는 그래서 20년 전 부터 계속된 것이다. 크림반도 분쟁의 핵심지역은 세바스토폴 항구다. 과거 소련남하정책의 전진기지였던 세바스톨항구엔 그 유명한 러시아(구소련)의 흑해함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다. 1995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협상에서 러시아가 흑해함대를 소유하는 대신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게 5억2천6백만 달러를 지불했다. 2017년까지 러시아가 세바스톨 기지를 사용하는 계약이다.

크림반도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세월이 갈수록 미국과 유럽연합(EU)쪽에 기울려 지면서 러시아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2005년 우크라이나에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소위 ‘오렌지혁명’이다. 친서방파인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이 취임했다. 흑해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폈다. 당연히 러시아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다. 2009년 친 러시아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전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서 쫒겨난 그다. 당연히 러시아가 그를 받아서 피신시켰다. 시위대의 압박에 못 이겨서 고국을 등진 야누코비치를 받아주고 여전히 그를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비호해주고 또 그의 이름을 앞세워 크림반도에 군사개입을 하고..등등 모든 것이 러시아의 공개적인 역할이다.  지난달 러시아의 소치에서 개최된 동계 올림픽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대통령은 올림픽 현장과 크림자치공화국을 3번이나 내왕 했다고 한다. 크림반도는 러시아가 지중해(유럽과 아프리카)로의 진출을 꾀하기 위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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