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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돌파구 ” 특사(밀사)외교 ” – 김동석

by kace

  • Posted on July 9, 2009

  • 뉴스

  1957년,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 쫒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모택동은 측근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볼세비키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한 명목이지만 소련에게 미국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방문 목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모택동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죽은 소련에서는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모택동은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스탈린 격하운동의 부당함과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에 대해서 연일 비난 연설을 했다. 모택동은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소련과의 단절 속에서 미국과 대결해야 하는 모택동의 처지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홀로서기였다.

소련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산업화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바로 그 유명한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다.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1966년까지 계속 되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게다가 소련 지도부와의 불화는 후르시초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 시대에서 더 한층 격화 되었다.

국경지대에서는 수백만 명의 병력이 대치했고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모택동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대비해서 베이징 지하에 방공호를 파라는 명령을 하달 할 정도였다. 태평양 건너 원거리의 미국보다는 소련이 우선 문제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내에서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낌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모택동을 중심으로 혁명의리로 뭉친 주은라이, 등소평, 주덕 등 기라성 같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인민들의 실생활근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주은라이와 등소평은 인민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수라고 여기고 모택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인민들에게 미국 제국주의를 소련의 수정주의와 아울러 중국공산당 최대의 적 이라고 매도하도록 부추겨 온 모택동의 급격한 변신은 소련의 군사위협 때문이었다. 1969년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미국카드’를 갖게 했다.

    1971년 3월 초, 일본 나고야에서 제 31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주은라이 중국총리는 중국대표단을 파견했다. 문화대혁명 발발 이후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중국대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선수단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으며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과의 접촉이었다.

미국과의 접촉을 위해서 중국 선수단에게 주은라이 총리는 미국관련 에티켓 교육까지 시켰다. 3월25일 나고야 탁구대회가 끝날 무렵 중국은 미국 선수단의 중국 초청을 발표했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가 들 끌었다. 며칠 후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미국 선수단 15명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대륙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스탈린이 죽은 직후에 생긴 소련과 모택동간의 틈새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을 숨죽이면서 감상하던 미국의 키신저가 쾌재를 불렀다. 밑 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의 월남전의 탈출구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닉슨과 키신저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야말로 ‘죽의 장막’으로 베일에 쌓여있던 중국대륙이 서구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닉슨의 특사로 쥐도 새도 모르게 부지런히 베이징을 드나든 키신저는 탁구선수단의 베이징 방문  불과 일 년 만에 중국을 우방국으로 만들었다.

1972년 2월,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앞장세워서 베이징으로 날아가 마오쩌둥 주석과 만났다. 두 나라는 ‘소련견제’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친구가 되었다. 두 나라의 관계개선은 각 나라에게 엄청난 정치. 경제적인 실익을 안겨주었다. 특히 중국은 막연한 가능성의 나라에서 외교적 경제적인 잠재력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란 지극히 현실주의적 발상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닉슨의 뒤편에 현실주의자 키신저가 있었다면 모택동의 뒤편에선 실용주의자인 등소평이 역할을 했다. 특사(밀사)외교의 가장 빛나는 성과인 ‘핑퐁외교’가 국제외교사에 전설로 기록되었다.  당시 필자는 모택동으로 대변되는 “중공‘이란 대륙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하는 영원한 철전지 원수로, 그리고 미국은 우리에게 하염없는 은혜를 베푼 하나님과도 같은 나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열 살을 갓 넘긴, 그야말로 지적인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필자에게 그러한 경천동지할 상황변화를 설명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핑퐁외교는 그 후 오랫동안 필자가 겪게 되는 지적인 혼란과 방황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키신저의 활약이 서방세계에 굳게 닫혀 있던 ‘죽의장막’을 걷어 올렸듯이 특사외교는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왔다. 조조군에 쫓겨서 최후의 보루였던 신야성마저 빼앗긴 유비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유비의 특사가 된 제갈량이 강남의 맹주인 오나라를 찾아 목숨을 건 외교전을 펼친 끝에 주유를 설득하고 손권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고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 3인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 영국의 방해로 만국평화박람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준 열사가 분사한 헤이그밀사 사건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는 7.4남북공동성명을 끌어내기 위해 이후락 정보부장을 평양에 밀사로 파견해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는 사실상, 전쟁 관계이다. 전쟁 중에 휴전을 합의했기 때문에 총알만 멈추었을 뿐이다. 양국가의 관계가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전쟁당사국인 셈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쏴대고 있어서 주변 국가들에게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당연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까지가 목표가 아니고 전쟁당사국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필자는 미국의 대외정책 핵심인 연방하원 외교위원장을 만났을 때에 바로 이것을 직접 물었다. ”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 평화의 길로 풀어 낼 방도는 없는가? ” 란 질문에 하워드 버맨(Howard Berman) 위원장은 오히려 주변국들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라고 되물었다. 그는 ” 중국과 일본, 심지어는 한국마저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주변국들의 요구가 평화인지 아니면 제각각 영향력 확대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를 방문 중인 오바마 대통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북한과 전쟁직전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마트외교를 주장. 강조하는 클린턴 국무장관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북. 미간 직접외교의 방식에선 관계의 진전을 이루었다.

주변국들은 6자회담을 통해서 자국의 먹이거리를 찾기에 급급하다. 일본은 북한을 활용해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목표이고 중국은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서 대미, 대일 관계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표다. 북미관계의 안정 속에서 우리 민족끼리 교류. 협력을 확대하는 일이 일본과 중국에겐 현재로선 유쾌한 일이 아니다.

국가 간의 이익관계를 살펴보면 민족의 과제는 선명해진다. 전쟁직전 위기에 카터가 클린턴 대통령의 명을 받아서 평양에 특사로 갔었고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었다. 그래서 “매들린 울부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할 수 있었고 곧바로 미국대통령의 평양방문이란 역사적인 사건을 목전에 두기도 했었다.

이미 평양이 낮 설지 않은 매를린 울부라이트 전 국무장관이나, 평양사람들에게 편안한 상대인 ‘빌 리차드슨’ 뉴멕시코 주지사 같은 전문 외교관들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그렇게 황당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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