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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김’의 패배 그러나 자랑스러운 케빈 김 -김동석

by kace

  • Posted on November 5, 2009

  • 뉴스

   ( 패배에 대한 자부심 )
   한인이민의 역사가 100년 이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바뀌면서 70년대와 80년대에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 되었다. 미국 동부지역 뉴욕도시권의 한인커뮤니티도 그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뉴욕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맨하탄에 직장을 정했어도 비용이 덜하고 비교적 안전한 퀸즈의 후러싱을 주거지로 택했다.

그래서 후러싱과 맨하탄을 오가는 소위 “7번 전철”은 한인 이민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만나서 낮선 이민생활의 고달픔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장소가 되었었다. 한인 이민생활의 처절함이 배여 있는 ‘7번 전철’에 대한 노래를 어느 대중 여자가수는 “ 덜컹덜컬 7번차를 타고서…’라는 노래로 한인커뮤니티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거의 대다수 한인 이민자들은 후러싱에서 가정을 꾸리고 거기서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냈다. 그러한 이유로 퀸즈의 후러싱은 한인들 덕분에 침체된 도시가 번성해지기 시작했다.

후러싱이 좋아졌다는 소문은, 특히 학군이 좋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을 자극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중국인들은 상권을 먼저 점유했고 부동산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홍콩의 자본이 곧 바로 후러싱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꼭 10년도 채 안되어서 7번전철의 종점인 후러싱 노른자위 지역은 중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완전하게 차이나 타운으로 변했다. 후러싱을 중심으로하는 뉴욕시 19지역구와 20지역구는 인구가 아시안이 절반이고 중국인은 한인인구에 꼭 3배에 달하는 동네가 되었다.  

  미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지역중심으로 작동한다. 각 당의 중앙에서는 지역 선출직에 대해서 어떠한 공천권도 행사할 수가 없다. 카운티 단위의 당 지도부가 논의는 하지만 결정은 철저하게 자유경선제이다. 당내 경선을 통해서 당의 후보가 되어야 하고 당의 후보는 당력을 총 동원해서 본선거전을 통해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유색인종 후보가 정치인으로 선출되는 일이 정말로 산 넘어(당 안에서…) 산(예비경선에서…)인 격이다. 뉴욕시에서의 중국인들의 파워는 오래전부터 막강했다.

세계경제의 심장부인 맨하탄 월스트릿을 대륙으로 연결하는 다리(부르클린다리. 맨하탄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의 중국인들의 희생을 아직 뉴욕커들이 잊지 않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한 중국인들의 영향력이 있고, 더구나 맨하탄 다운타운의 금싸라기 땅인 차이나타운이 있음에도 뉴욕시의원에 중국인이 등장한 것이 불과  8년전 이었다.  뉴욕시의원은 세계의 시의원이라고 불릴 정도다.

뉴욕시의 인구는 2008년을 기준으로 약8백50만이다. 부르클린(16개의 지역구), 퀸즈(14개), 맨하탄(10개), (브롱스(8개), 그리고 스테이튼아일랜드(3개). 등 5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뉴욕시의 의회가 생기고차이나타운(약10만명의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타운)이 형성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그동안 중국인 시의원이 없었을 정도로 뉴욕시의원직이 얼마나 텃세가 심한 곳인지 짐작이 간다.

아시안 밀집지역인 19, 20지역은 한 지역구의 인구가 실제로는 50만여 명에 가깝다고 한다. 자기 지역구의 일에 관해서는 거의 결정권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고 지역주민들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시의원의 권한이 보장되어 있다. 뉴욕시의원직에 버금가는 선출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막강하다. 뉴욕시장의 권한과 영향력을 감안해 보면 뉴욕시의원직도 짐작이 갈만하다. 따라서 뉴욕시의원에 도전하려면 우선, 그 지역의 당에서 (활동을 해서) 인정을 받아야 하며 그 지역의 공적인 일에 활동경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출마를 언급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일단 시의원에 당선이 되면 상위직 정치인들인, 시의장이나, 시장, 감사원장등으로부터 구애를 받기 시작하고 연방(상.하원)정치인들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매 4년마다의 대통령선거시 거의 자동적으로 선출직 대의원이 되기 때문이다.

   뉴욕시 시의원 제 19지역구는 퀸즈의 노른자 지역이며 아시안의 밀집지역이다. 유권자의 다수는 중도보수성향의 백인 민주당원들이다. 19지역에서 2001년 시의원에 당선된 ‘토니 아벨라’씨는 경제이슈는 민주당 아젠다를 들었지만 가치 이슈로는 공화당 성향의 투표를 했다. ‘아시안들의 극성’을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그는 인종편견을 갖고 있는 토박이다.  

뉴욕시 전역에서 그나마 공화당세력이 살아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백인 민주당원이 자당의 후보가 유색인종이면 오히려 공화당의 백인 후보를 찍을 정도로 당성이 인종편견을 넘지 못하는 백인들이 주류인 지역이다. 그래서 주 상원은 공화당이 갖고 있다. 민주당원이 아니고서 유색인종이면 시의원으로 감히 생각도 할 수없는 곳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아시안 밀집지역인 19지역과 20지역 가운데에 아시안 후보에겐 20지역이 훨씬 쉬운 지역이다.

2001년 ‘중국인 뉴욕커’들의 염원을 해결했던 중국계 ‘존 루’씨의 시의원 당선이 바로 20지역이었다. 만 8년 동안 ‘존 루’씨는 자신이 이 지역을 한인들에게 넘겨주어야 자신이 한인들의 지지를 유지할 것이란 판단에 한인후보를 물색해 왔었고 그는 과감하게 한인후보인 ‘존 최’를 지명했었다. 한인후보의 난립으로 실패를 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19지역에 뜻을 품고 눈독을 들여온 한인 후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케빈 김”이다.  

4년 임기의 시의원직에 출정할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다가 2008년 초반부터 은밀하게 결심하고 준비를 해 왔다. 그는 2005년 말경부터 그 지역에서 거의 30년 민주당을 주도하는 거물 연방하원인 ‘게리 애커맨’ 지역구 사무실에 보좌관으로 들어갔다.  만4년 동안 아이비리그 출신의 두뇌가 거의 자원봉사격 으로 애커맨을 보좌했다. 당연히 순식간에 다른 모든 보좌관을 제치고 애커맨 의원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2006년 초반에 유권자센타가 추진하는 한국과 미국간 비자면제 프로그램에 애커맨 의원이 동의해서 나서도록 설득했다. 2007년도엔 ‘일본군위안부결의안’에 애커맨이 관심을 갖도록 했으며 2007년 2월15일 연방하원 외교위원회에서의 청문회 때엔 애커맨의원이 거의 20여분 이상 유태인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가면서 결의안의 지지설명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애커맨 의원은 사석에서도 ‘케빈 김’을 언급하면서 가장 뛰어난 보좌관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오히려 애커맨 의원은 필자에게 ‘케빈 김’에 주목하라고 할 정도이다.

지난 9월15일 민주당 예비경선 때엔 19지역에서 애커맨 의원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인 민주당 지도부가 케빈의 상대후보를 지지 선언했음에도 애커맨 의원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아주 특별하게 지역의 미디어를 불러 놓고서 ‘케빈 김’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케빈 김’은 당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당당하게 경선에 나가서 월등하게 승리를 했다. 뉴욕시 민주당이 놀랐고 뉴욕도시권의 한인커뮤니티가 감탄했다. 마치 2005년 뉴저지 에디슨시장에 도전해서 악전고투하면서 시장직을 거머쥐었던 최준희 시장의 드라마를 다시 연출한 것이다.

19지역구 민주당 지도부가 공식 지지 선언한 ‘제리 아이네스’후보를 550여 표 차로 따돌리고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다. ‘케빈 김’의 이미지는 역시 reformer(개혁선도자)이다. 오바마시대의 정치권 화두인 “희망과 변화”이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뉴욕시민을 위해서 투명한 정치. 공익우선의 원칙, 교육의 질적 향상, 소수계 차별철폐..등을 강하게 내세웠다.

그는 백인 주류정치인들의 눈치에 무감각했다. 당의 입장이라고 무조건 추종하고 동의하질 않았다. 지난 9월 19일 뉴욕한인회가 주최한 맨하탄 한인퍼레이드 행사에 불룸버그 시장이 참가를 했는데 한인커뮤니티의 행사를 찿아 준 시장에 감사하느라 소신있게 민주당 후보들과 행진하지 않고 시장을 따르기도 했다. 그는 분명히 한인 밀집지역의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그리고 한인커뮤니티에서 자라난 정치인임을 확고히 했다.  

출마를 결심할 때부터 ‘케빈 김’은 ‘당선’이라는 목표보다 한인커뮤니티의 권리와 이익을 우선 하면서 한인사회가 모범시민사회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세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야 쉽지 않은 선출직 정치직에 인생을 걸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선출직에 나가려는 한인 1.5세나 2세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그 동기를 많이 들어 보았지만 , 이렇게 명쾌하게 정치인으로의 진출 목표가 뚜렷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2005년 말경 대권도전을 결심하고 소수계 풀뿌리 단체들을 찿아 다니면서 이해를 구하던 오바마 캠프의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2005년 ‘케빈 김’은 과연 전 세계의 한인정치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만나고 싶다고  재외동포재단에서 주최하는 한인정치인포럼에 유권자센타 스텦과 함께 참가를 했었다. 그는 이미 한국의 유력한 법무법인에서 수개월간 인턴경력이 있었고 일본과 중국에 유학하기도 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아시안 정치인으로 성장하기엔 최고의 경쟁력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스페니쉬에 유창하다.  유권자센타는 ‘케빈 김’의 이전에 그의 가족과는 오래된 인연이다.

지금은 그 선출방식이 달라졌지만 2004년까지 뉴욕시의 교육위원도 지금의 뉴저지와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의 일반선거로 선출되었다. 1998년도에 유권자센타는 후러싱 한인밀집지역구의 학군인 제26학군에 한인을 교육위원에 당선시켰다. 그때의 그 교육위원이 바로 ‘케빈 김’의 누이인 ‘리사 김“씨였다.  지금은 한국의 부산에서 살고 있다.

필자는 2004년도 맨하탄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한인 아주머니를 한분 우연히 만났었는데 알고 보니 ‘케빈 김’의 어머니이다. 당시 버지니아의 상원의원인 ‘조지 알렌’과 아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케빈 김’의 어머니는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중앙당의 정치행사에도 빠지지 않는 한인 단골 참석자이다. 양당의 정치행사에서 기부금을 요청하는 우편물이 오면 몇 십 달러씩이라도 빠지지 않고 보냈다고 한다. 그러한 일을 30여년 이상 꾸준하게 그렇게 해 오고 있다.

공화당내에선 조지 부시 대통령 당시 상원대표였던 ’빌 프리스트‘와도, 오랫동안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냈던 ’조 워너‘, 그리고 민주당내에선 클린턴 전대통령 부부와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가까운 사이이고 ’케빈 김‘의 정치 대부격인 게리 애커맨 의원을 비롯해서 잭슨 하잇츠 지역의 ’조 크라울리‘ , 그리고 이번에 뉴욕시 감사원장에 선출된 ’존 루‘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며, 뉴욕시 지역민주당의 간부들과 막역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이다.  

소액 정치기부금을 30여년 이상 지속적으로 보내면서 맺어 온 정치권과의 인연이 이번에 ’케빈 김‘의 시의원 출마에 한 몫을 단단히 한 것이다. 이렇게 양당의 정치권과의 관계를 갖은 사람은 한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다. 한인커뮤니티의 주요 정치행사에 참석해서 기부하는 것이 일상화 된 분이다. 아마도 케빈은 시민사회의 “참여정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할 듯하다.

5살 때에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부모손에 이끌리어 이민자로 이 땅에 왔다. 모국어를 떠난 땅에서 어렵게 정착하는 이민자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한인커뮤니티에서 컸다. 공립학교를 다녔고 한국인의 아들답게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 스탠포드에 입학했다. 아시아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공부하고 활동했다. 스탠포드에서 석사학위까지 끝내고 콜롬비아대학의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자기가 자라난 뉴욕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는 곧바로 퀸즈의 후러싱으로 돌아왔다.   ‘케빈 김’은 그야말로  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전형적인 1.5세이다. “미국서 출세하려면 백인들과 어울려야 하고, 영어에 액센트를 없애려면 한국어를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자식출세지향적인 사고의 한인어머니들에게 올바른 사고의 멧세지를 강력하게 던져주고 있기도 하다.

  유권자센타는 초당적인 정치참여활동 비영리 단체이다.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해서 일하면 불법이다. 2005년 전까지 무명의 이름으로 일 할 때엔 별로 민감하게 문제 제기가 되지 않았는데 유권자를 모아서 한인으로 결집을 하고, 투표시 부당한 일이 생기면 연방법무부에 고발을 하고, 더구나 2007년 워싱턴 의회를 상대로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 시키면서…그렇게 점점 더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러 곳으로 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정작 ‘케빈 김’의 선거에 구체적인 도움을 줄 방도가 별로 없었다.

필자가 대중행사에서 ‘케빈 김.의 피켓을 들고 있으면 곧바로 문제제기가 들어온다. 유권자센타는 아이디어를 냈다. 적어도 19지역에서 아시안의 투표율을 올려야 하겠다는 방안이다. 아시안유권자 투표율 올리기 캠페인을 했다. 유권자들과 직접 접촉한 결과 아시안 유권자들 대부분이 ’케빈 김‘ 후보가 이미 시의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 9월15일 예비경선에서의 승리“를 이미 시의원에 당선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메일을 보내고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애를 썼지만 너무나 늦은 시기였다. 또 한 가지는 ‘케빈 김’이 거물 정치인들을 자기 세력으로 공개적으로 끌어 들이는 효과가 아시안 유권자들에겐 역효과가 나고 있었다. 투표에 적극참가하지 않더라도 ‘케빈 김’의 당선이 이미 대세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11월3일 선거에서 19지역의 아시안 유권자의 투표율이 저조한 원인이다.

캠페인 전략에서 덜 치밀하고 덜 프로페셔널한 부분이라 생각이 된다.  11월3일, 화요일은 워싱턴DC의 의회일정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케빈 김’의 정치스승인 ‘게리 애커맨’의원이 직접 현장에 내려와서 하루 종일 케빈 을 위해서 지원 유세를 했다. 과연 ‘케빈 김’이 큰 정치인으로의 자질이 있음을 입증해 주는 상황이다. 워싱턴 연방의회에서 ‘게리 애커맨’은 시간을 내는 데에 가장 철저하고 인색한 정치인으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다.

현직인 “토니 아벨라”의 민주당에 대한 배신이 결정적인 패인.
2001년도 19지역에서 시의원직에 처음 진출한 토니 아벨라 의원은 한인사회와는 질긴 악연을 갖고 있다. 한인경제인협회가 그렇게 공을 들여서 추진하려고 했던 브로드웨이 한인도매상가 칼리지포인트 이전계획을 무산시킨 장본인이고 이미 건축허가를 받았지만 커뮤니티 보드를 동원해서 한인 이민교회인 “만나교회”의 건축을 저지시킨 인물이다.

더구나 그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뉴욕시로 부터는 물론이고 퀸즈 보로청장, 주하원의원의 동의를 받아낸 ‘인스파 월드’사우나시설의 건축을 끝까지 반대 하면서 한인 업자의 애를 먹이기도 했다. 그는 시의원직 8년 동안 19지역구의 민주당(유권자)을 공화당 성향의 중도파들이 당의 중심이 되도록 바꾸어 놓았다.

케빈 김이 시의원직에 출마를 선언 했을 때에 처음부터 동의해 주질 않았었다. 이 지역의 정치맹주인 애커맨 의원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케빈 편에 섰다. 경선에서 이기고 당의 후보가 되면 당연히 인정하고 지지를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토니 아벨라는 본 선거 임박해서는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9월15일 예비선거전에서 당의 유권자층이 ‘케빈 김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결속되는 것에 대한 토니 아벨라의 인종편견적 반응인 것이다. 이 지역에서 8년 동안 시의원직을 유지하면서 토니 아벨라는 자신의 소속정당인 민주당의 정치세력을 강화 시킨 것이 아니고 지역의 백인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정치기반을 엮어왔다. 그는 퀸즈의 노른자위인 후러싱과 베이사이드 화잇스톤 등지에 아시안들이 대거 밀려와서 아시안 타운으로 변하는 것에 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19지역을 주거안정지역으로 보존하겠다는 일념으로 뉴욕시의원 8년동안 내내 조닝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애초의 ’케빈 김‘의 대’토니 아벨라‘에 대한 전략은 [ 예비경선에선 그와 대결해서 이긴다. 당의 후보가 되고나면 그가 당의 현직인 만큼 최소한 침묵을 지킬 것이다 ]라고 전제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공화당후보를 지지할 것으로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선출직에 미련이 있는 사람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현역(시의원)이 상대당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선언은 선거당일 투표소로 가는 민주당 유권자(전체유권자의 55%)의 발을 묶어놓게 되었다. 민주당 유권자의 저조한 투표율의 원인이다.  

한인유권자의 (이해할 수 없는) 저조한 투표율
  소수계(정치비주류)가 정치직에 진출하려면 그것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전략적이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소수계 전략의 핵심은 “결집”이다. 자기 커뮤니티의 결집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없다. 자기 커뮤니티에서 운동원이 나와야 하고 자기 커뮤니티로부터 기본적인 정치자금(Fundrasing)이 나와야 한다.

19, 20지역의 한인사회 염원은 분명히 한인시의원이다. 그것은 우리(한인동포사회)가 지난 만8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중국계 시의원인 ‘존 루’를 찿아 다니며  별것을 다 하소연 했었다. 우리가 그의 덕도 많이 봤지만 불만도 많이 쌓였다.  일이 있을 때마다 동포사회는 “한인시의원”을 노래로 부를 정도였다.  이정도면 예비선거를 통과한 ‘케빈 김’ 선거에 한인유권자들의 투표참여와 한인동포사회의 기금모금 에 대해서는 큰 걱정이 아니었다.

남미계도 흑인계도 ( 유태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중국계를 포함한 아시안 커뮤니티도 선출직 정치인을 배출할 때엔 기본 지지세력(자기커뮤니티)의 투표율이 70% 이상을 확보하고 출발을 한다. 더구나 캠페인 자금을 모으는 일에는 더 극성스러울 정도이다. 소수계 후보의 선거자금은 백인후보의 4배에 달해야 경쟁을 할수있는 것이 미국의 정치판이다.

이번 11월3일 ‘케빈 김’의 선거에서 한인 동포사회는 위의 두가지 요소 모두 철저한 침묵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유권자의 투표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19지역구내 한인유권자수는 3천5백14명(유권자센타 자료)이다. 한인 유권자 1천3백여 명 정도가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본선거를 위한 캠페인에서는 절대 다수인 백인 유권자를 직접 공략하지 않으면 표를 얻기가 힘들다. 두가지이다. 유권자직접 방문(Door to Door)과 전화걸기(Phone Tree)이다. 백인 운동원들을 고용해서 유창한 영어로 지지를 부탁하는 일이다. 케빈 김 캠프가 본선거 한달을 앞두고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인동포사회로부터 도무지 모금의 실적이 오르질 않았기 때문이다.

한인시의원의 가장 큰 혜택은 유권자(한인시민권자)들보다는 동포사회내 절대 다수인 영주권자와 서류미비자 층이다. 왜서 이들이 ‘케빈 김’의 선거에 침묵했는지 알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이다. 19지역에서 ‘만나교회’ 사건이 불거졌을 때에 한인교회들이 울화통을 터뜨리며 해결책을 궁리했었는데 ‘케빈 김’의 선거를 위해서 어느 교회에서도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린카트 법안을 저지하려고 한인청과협회가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그렇게 애를 쓴지가 불과 일년이 채 안되지 않았는가..?  브로드웨이 한인도매상가 이전문제가 시의원의 반대에 부딪혀서 불발이 된 그러한 쓴 맛의 경험을 갖고 있는 한인경제인들이 이번 ‘케빈 김’의 선거를 위해서 특별하게 나선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 모를 일이다. 한인유권자의 저조한 투표율과 동포사회로부터 기금모금이 부진했던 것은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11월3일 자정무렵 ‘케빈 김‘이 패배를 인정한 그 자리에서 그의 어머니인 김순자 여사는 그렇게 표현은 안했지만 “ 정말로 한인동포사회가 야속하다 ”란 그야말로 아쉽고 안타까운 원망의 마음을 필자에게 전했다.  한인 정치후보에게 동포사회가 늘 제기해 왔던 단골문제인 * 우리말을 못한다. * 한인동포사회의 문제를 잘 모른다
* 예의가 없어서 인사도 잘 안 한다 * 지지하고 지원했음에도 고맙다는 인사가 없다 * 다른 동네에서 컸고 동포사회 봉사경력이 없다 .   이러한 문제도 없었던 그야말로 최적의 한인후보에 왜 동포사회가 침묵했는지…크게 논란이 되어야 할 일이다.        

갑자기 불거진 인종문제

상대후보는 그 자질 면에서 도저히 ‘케빈 김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19지역에서 성장하면서 “착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소문났던 그가 동네를 위해서 돌아왔다. 19지역이 키워낸 수재 ’케빈 김‘이란 이미지가 먹혀들면서 상대후보는 초조해지기 시작 했다.

케빈을 이기기 위해서 공화당 후보가 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인종문제였다. 더구나 백인 터주대감들에게 반아시안 정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선거 20일 남기고 ’ 퀸즈를 아시안에게 넘겨줄 것인가? ‘ 란 인종문제를 적극적으로 유포시켰고 상대후보의 운동원이 케빈 김의 자원봉사자를 구체적으로 위협하는 사건이 터졌다. 캠페인의 전선에 인종문제가 순식간에 퍼질 위기였다. 이러한 국면을 피하느라 케빈 김의 캠프는 소극적 대처였다.

인종범죄에 대해선 경찰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기존 캠페인 방식을 유지했다. 네가티브에 네가티브 대응을 하려면 미디어를 동원해야 하는데 주류미디어의 동원은 거액이 준비되어야 할수있는 일이었다. 막판에 울화통 터지는 일이었다. 갑자스럽게 19지역 백인 노인층에 흉물스런 아시안들의 이미지가 확산되었다. 예비선거에서 지지했던 민주당 유권자도 돌아섰고 절대 다수인 공화당 성향의 백인유권자들이 의지적 반대세력으로 돌변했다. 선거직전에 처방이 별로 없는 그야말로 극약이었다.

19지역은 뉴욕시 공화당의 명운이 달려있는 전략지역.

19지역은 퀸즈 지역에서 오랫동안 주 상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프랭크 파다반 의원의 핵심지역이다. 토니 아벨라 현직 시의원이 있기 전까지 이곳은 뉴욕시내 유일한 공화당 시의원지역이었다. 주거와 상가가 명확하게 구분 되어있고 비교적 넓은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공화당 세력이 강하고 아이리쉬, 이탈리언계가 많다. 유태계도 많지만 유태계 지역은 민주당 주 상원의원인 토비 앤스타비스키의 텃밭이다.

19지역의 선거구상 특성은 주 상원 두 개 지역구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그동안 공화당의 프랭크 파다반의 아시안지지세가 강했는데 만일에 ‘케빈 김’후보가 당선되면 아시안들의 표가 급격하게 민주당으로 기울게 되고 그러면 프랭크 파다반의 정치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지난 상원의원 선거에서 파다반 의원은 민주당의 지네로 호보와의 경쟁에서 100표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겨우겨우 의원직을 유지했다. 그래서 파다반 의원 역시 이번 케빈 김 선거전에서 반케빈의 선거전에 사할을 걸고 뛰어 들었다.

전체 유권자의 75%가 현직인 마이클 불룸버그 시장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곳이다. 민주당 입장에선 이번에 케빈 김 후보가 승리했으면 다음번 상원의원도 탈환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민주당 거물들이 케빈 김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뉴욕시 의회의 의장인 크리스틴 퀸, 찰스 슈머 연방상원의원 , 뉴욕주민주당 오너격인 쿠오모(마리오 쿠오모와 앤드류 쿠오모)계가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에 아시안 후보가 절대 약체라고 공화당에서는 자기당의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뉴욕시의 당력을 집중시켜 캠페인을 전개했다. 공화당 특유의 네가티브인 인종문제가 왜 터져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있는 일이다.

  ‘케빈 김’은 진중한 외유내강형이다. 부드러운 성품을 갖고서 은근하게 주위의 시선을 자신의 아젠다에 집중시키는 특별한 지도력을 갖고있다.  중국계와 한국계가 아시안 커뮤니티의 거의 전부인 19지역과 20지역구에서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선출직으로는 최적의 후보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성장했고 오래전부터 동네에서 착하고 공부 잘하는 우수한 한국계 우등생으로 동네 주민으로부터 주목을 받아왔었다.

뉴욕시 공립학교 중등부 과정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만 받아들이는 타운슨앤 해리슨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스탠포드대학교와 컬럼비아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성적이 뛰어난 모범생이지만 불량끼의 친구들까지도 그와 가까이 하고 싶었던 리더쉽을 발휘했었다. 또한 그는 지역선출직에선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오랜 원칙까지 저버리면서 퀸즈와 롱아일랜드의 맹주인 ‘게리 애커맨‘ 연방하원의 공개적인 지지를 받을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 지역 민주당내의 터주 대감들로부터 공천을 받은 ’제리 아이니스‘후보에 당당하게 맞서서 경선에서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후보가 되었다. 그는 캠페인의 자원봉사자들로 고등학교때의 친구들을 찾아서 모았다. 곳곳에 그의 친구들이 있었다. 소방관으로, 학교의 선생님으로, 조그마한 가게의 주인으로, 경찰관으로, 작고 큰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그리고 어릴적 그를 가르쳤던 은퇴한 선생님들까지도 그를 환영하고 적극 도왔다.

그들은 동네의 발전을 위해서 케빈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냈다. 그의 캠프를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후러싱 지역의 인종커뮤니티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안계, 남미계 흑인, 그리고 백인계의 자원봉사자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가장 모범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선거 막바지에 터진 ’인종문제‘가 아니었으면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 지역의 통합의 리더쉽으로 정말로 멋있는 출발을 예고했었다.  숨죽이면서 시작한 2009년 시의원 선거가 성공의 문턱에서 밀렸지만 한인정치인 배출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아직도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인종편견‘이란 복병에 대해서 새롭게 각성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케빈 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이 시작은 한인동포사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동포사회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응해야 함을 1세 커뮤니티의 리더쉽에 숙제로 안겨 주었다. 더 전략적이어야 하고 더 결집해야 하는 것이 한인 공동체의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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