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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대통령에 취임한 조지 부시와 북핵 문제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한 조지 부시는 클린턴 재임동안의 미국의 대외정책을 낱낱이 검토(review)했다. 부시의 주변에 새롭게 포진된 대외정책 강경파들이 가장 눈독을 들인 부분이 클린턴의 대북정책 이었다. 새 행정부의 대외정책 담당자들은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과의 협정을 맺은 것이 잘못됐다는 입장에서 출발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의 공갈 위협에 속아 핵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경수로를 건설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라는 것이다.

국방정책 자문위원인 리차드 펄은 ‘북한은 미국에 더 이상 공갈이 먹혀들지 않자 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처럼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제네바 협정은 합의는 공갈에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펄은 아주 강하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붃한 주민의 관범에서는 정권교체가 더 나은 삶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 후 부시 권력에서의 대북정책의 목표는 북한의 정권교체였다. 대통령 명령체계에 가장 가까이 있던 울포위츠(당시 국방부부장관)는 2002년 8월 북한의 신포 경수로 콘크리트 타설식에서 북한이 제네바협정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에 핵 합의를 폐기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고 김정일 권력은 비밀리에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5월16일 공화당 상원의원들과의 비공개 대화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피그미’라고 부르며 ‘식탁에서 버릇없이 구는 아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때 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가르켜서 깡패국가,악의축,폭정의 전초기지.. 으로 표현하면서 선제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기도 했었다. (이당시 미주한인사회에는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북한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어떠한 이유에서건 전쟁은 절대불가 하다는 두가지 의견이 있었는데 필자는 대통령의 발언 중에서 ‘선제공격’이란 용어를 빼 줄 것을 요청하는 의회결의안을 상정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이와같은 강경한 분위기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더욱 심각해져서 펜타곤에선 ‘동시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검토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양측간 협상의 통로를 찾으려는 노력도 있었고, 주변 국가들의 협력과 합의도 있어서 3자회담, 6자회담을 거쳤지만 미국의 강경하고 일방적인 요구에 생존하려는 처절한 북한의 버티기로 결국에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까지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인하여 대표적인 강경파인 럼스팰드, 울포위츠 같은 주전론자들이 퇴진을 하면서 외교. 안보팀내의 온건파들이 백악관과 국무부에 들어섰고 그들의 입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곤돌리사 라이스 장관이 2005년 8월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를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로 임명했고, 장관의 요청에 의해서 대통령은 그에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전권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권력의 붕괴를 목표로 했고 그것을 기대했던 초강경파들의 최종목표(Hidden Agenda)는 중국이었다. 동북아지역의 패권을 중국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중국에 기대어 있는 북한을 우선 정리 하자는 단순논리였다.

베이징 올림픽을 치루면 중국은 이제부터 미국에 대항하게 될 것이란 것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오콘으로 대변되는 초강경파들이 중동문제엔 정통했지만 동북아지역의, 특히 북한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린턴때 이미 잘못 예상한 것으로 결론을 냈던 [북한권력자동소멸론]을 다시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강경파가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을 지냈고 유엔대사를 지낸 ‘존 볼턴’ 이다. 그는 봉쇄와 압박의 강도를 높이면 북한은 내부 봉기가 일어나게 되고 그러면 미국이 접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힐’은 그들과 달랐다. 힐은 현실외교론 자다. 힘의 논리를 피해가야 하는 상황이 어느 때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북한권력을 소멸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협상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라이스 장관을 설득해서 6자회담에 관해서는 자신과 장관과 대통령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을 지켜줄 것을 약속 받았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엔 아직도 네오콘들의 잔존세력이 남아있었다. 힐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지난해 10월3일 “북한은 그해 말까지 핵 신고서를 제출 한다”란 ”이란 소위 10.3 합의를 도출했다. 가장 놀란 곳은 워싱턴내의 강경파들이다. 그래서 갑자기 터진 사건이 북한과 시리아 핵 관련설이다.

이스라엘이 폭격한 시리아 시설물에서 북한의 핵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워싱턴에 날아다니게 되었다. 6자회담 성사의 한 고개를 넘어가려던 크리스토퍼 힐에게 강경파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연방하원 외교위 간사인 공화당의 로스 넷트넨 의원은 더 이상 북한과의 협상은 포기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라이스 장관과 대통령의 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끝내는 북한이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핵 신고서를 제출 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이 핵 신고서를 제출하고 영변의 핵 냉각탑을 폭파하겠다는 이벤트까지 연출하기까지는‘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 간의 계산된 주고받기가 정직하게 이행된 것이다. 가장 최근까지 미국은 제2차 핵 위기 발발의 원인이었던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워싱턴내 강경파들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시리아와의 핵 협력 의혹을 신고서에 담으려는 미국과 근거가 없다는 북한간의 줄다리기가 팽팽하게 이어져 왔었다. 전적으로 두 사람간의 의지로 타결이 된 것이다.

지난 3월13일 두 사람은 제네바에서 그리고 4월8일 싱가포르에서 두 사람이 만나서  “신고서”에 대한 잠정 합의를 도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힐 차관보는 강경파들의 저항과 보수 언론들의 방해에 거의 초죽음이 되었고, 심지어는 막판에 ‘사직의사’를 내 비치기도 했었다. 바로 그때 부시 대통령과 곤돌리사 라시스 장관이 힐의 협상안에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보냈고 북한은 1만8천822쪽에 달하는 영변 핵시설 가동일지를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지난 26일 북한이 중국에 신고서를 제출했고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 리스트에서 해제한다는 입장을 의회에 통보했다.

이제 45일 후 부터는 북한과 미국간 만이 아니고 서방세계간의 교류의 폭이 크게 확대되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길고 길게, 밀고 당기는 게임이 서로의 작은 신뢰를 만들어 내면서 양자의 승리로 결론을 냈다.  

미국과 북한간, 다시말해서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 사이에서의 빚나는 성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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