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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센터 시작과 오늘 – 김동석

by kace

  • Posted on April 24, 2010

  • 뉴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우울하게 노래했던 사람은 영국의 주지파 시인인 “T.S 엘리어트” 이다. 전쟁으로(1차 대전) 폐허가 된 대지위의 절망을 노래한 ‘황무지’에 나오는 싯귀이다. T.S 엘리어트는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캣츠]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인 10대 후반기에 누구든지 다 그랬지만 필자는 유별나게 문학에 집착을 했었다.


음산하고 우울하고 희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이 노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입에 달고 즐겼던 것 같다. 그때는 순전히 폼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임을 절감했던 사건은 30이 훨씬 지나고서인 1992년 LA의 4.29폭동이다. 아들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서 살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바로 그때였다. Korean American 이 무엇인지 이 이상 심각할 수가 없었다. 4.29폭동은 필자에게 미국이 무엇인지 가장 적나라하게 명확한 대답을 주었다. 미국은 법치국가가 아니고 철저하게 힘(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알아차렸다. 힘의 논리에 수긍하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음을 아주 냉정하게 알아차렸다.


  후러싱의 외진 곳(당시 프린스 스트릿 선상 맘모스 당구장 있던 건물5층)에 남녀 청년들 30여명이 모였다. 시카고와 LA에서도 몇 명이 참가했다.  [‘폭동’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의 세미나였다. 강사는 당시 뉴욕신학대학교의 총장인 ‘버논 멘슨(Vernon Manson)’박사였다. 청년기 변호사로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그 후론 맨하탄 할렘에서 극빈층을 위한 특수목회를 한 경력의 학자이며 목사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수차례 세미나를, 토론을, 또한 끝이 없는 논쟁을 했다. [소수계로서 미국에서 살아남기]란 절박한 주제였다. 결론은 한인커뮤니티의 보호막이다. 그러한 합법적인 보호막은 빨리 그리고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미국 속에 한인커뮤니티가 존재하는 한 누군가가, 언젠가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 것은 명백했다.


전국의 10여명이 30년을 계획했다. 2025년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 30년이란 기간 동안 한인들의 정치력을 결집하는 일이었다. 1993년의 논의가 만2년을 끌었다. 1996년 4월에 비영리법인으로 후러싱에 “한인 유권자센타(Korean American Voters’ Council)”를 설립했다. 당시 한인회장. 정치력신장위원장을 모시고 우리의 이 정치력신장 운동이 동포사회 중간에 위치하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뉴욕의 한인 유권자센타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올해로 만 14년이다.


  “4월의 참혹함, 폭동을 잊지 말자! 그리고 줄기차게 2025년을 향해서 가자”라고 했지만 3년, 5년이 지나면서 어디론가 다 흩어지고 유일하게 뉴욕서만 3명이 남았다. 그야말로 ‘오기’ 하나로 버텼다. 그렇게 10년이 흘러서 유권자로 3만을 등록시켰다.  뉴욕과 뉴저지에서 한국어 투표서비스가 성사 되었다. 우리말 투표로 인해서 투표율이 껑충 뛰었다. 지역의 공화. 민주 양당으로부터 접촉이 쇄도했다. 2004년, 2005년도에 생겨난 일이다.


필자가 책임자라고 공화당의 맨하탄 전당대회, 민주당의 보스톤 전당대회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2세 정치지망생들의 한인유권자에 대한 문의가 많아졌고 주류정치인들의 한인커뮤니티 방문이 이어졌다. 뉴욕의 한인사회 내에 유권자단체, 정치력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력신장 목소리가 커졌고 한인들의 지역사회 참여의 폭이 넓어 졌다.


  그리고 2006년에 대외적인 첫 성과를 냈다. 뉴욕서 결집한 한인들의 정치력을 기초로 해서 한국과 미국간 비자면제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유권자의 힘이 워싱턴서 신기할 정도로 작동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지쳤던 심신에 새록새록 힘이 생겨났다. 2007년엔 배짱으로 워싱턴서 일본과 맞붙었다. 정말로 배짱 하나였다.


일본의 협박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친일계의 정치인과 기업들로부터 엄청난 시달림을 당했다. 가까운 스텝들과 일반인들에게 그것을 숨기느라 한때는 정말로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때에 정말로 처음으로 ‘내가 겁이 많은 편이구나!’를 깨달았다. 방어와 보호를 위해서 2008년 독도명칭 문제에도, 한. 미 간 동맹관계를 결속시키는 일에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 DC 캐피톨(의회)에 ‘한인들이 떠오른다’란 소문이 나는 것을 보고서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30년 프로젝트의 전반기이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이다.


  나머지 절반의 15년을 향해서 다시 출발을 한다. 이제는 몇몇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함께가 아니라면 멈추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동포들이 아주 구체적인 지지와 참여가 있어야 할 때이다. 또 그러한 참여를 기대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최근에 한국에서 미국을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 무비자 혜택을 받았으면 소주한잔 사시오 ’라고 습관처럼 이야기 하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이 인정을 한다. 한인동포들이 자랑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간다.’란 말이 있듯이 앞으로의 15년도 정말로 후딱 지나갈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차고 넘쳤던 ‘머리와 입’이 이제부터는 ‘손과 발’로 변해야 한다. 구체적인 참여는 성원과 지원이다.


4월30일 유권자센타 연례만찬에 일반 동포들이 참가해 주시는 것을 이제는 기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4.29폭동을 잊지 않기 위해서도 4월30일 대동연회장의 유권자센타 연례만찬에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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