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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지와 끈기의 풀뿌리 정치인 “ 론 김 ” – 김동석

by kace

투지와 끈기의 풀뿌리 정치인 “ 론 김 ”

1993년 1월, 미국 제42번째 대통령에 취임한 ‘빌 클린턴 (Bill Clinton)”은 사실 국가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할지가 막막했다. 레이건과 부시, 두 대통령을 거치면서 미국은 공화당에 의해서 이미 가장 위대한 나라로 섰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몰락은 지구촌의 운명을 미국에게 맡기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클린턴의 선거 전략은 잔머리 수준을 살짝 넘는 방식이다. 경쟁후보인 부시 대통령을 위대한 미국으로 이끌었다고 한껏 추켜세웠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은 선거판에 인기 절정에 올랐다.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 공화당이 16년을 하겠구나!”였다.

그러나 선거일 직전에 돈만주면 뭐든지 하는 클린턴의 선거참모 ’딕 모리스‘가 공중파를 장악했다. 하루 종일 틈만 나면 한시대가 갔다고, 소련의 몰락으로 미국에겐 책임이 더 커졌다고 해댔다. 부시대통령은 영웅임에 틀림없다. 냉전시대의 전쟁 영웅이라고 하면서 이제 냉전시대는 갔다고 하는 방송을 해 댔다. 누가 미국을 21세기로 이끌 것인가? 란 담론으로 유권자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는 데에 성공했다. 빌 클린턴은 40대 중반의 나이로 그렇게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공화당, 민주당 가리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인기만 있으면 결정하고 시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요론조사에만 열중했다. 양당의 울타리가 무너졌다. 그의 정책은 민주당 좌파보다 더 좌파이고 어떤 때는 공화당 우파보다 더 우파정책을 부담 없이 실시했다. 인기가 높아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최초의 민주당 재선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웠다.

클린턴의 민주당은 이미 민주당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민주당의 냄새도 없고 전통도 사라졌다. 그를 이어가겠다고 대통령에 도전한 ‘앨 고어’에 도전한 후보가 민주당의 이 문제를 끄집어냈다. 바로 뉴저지 출신의 ‘빌 브래들리’다. 2000년 예비경선에서 ‘앨 고어’에겐 역부족이었지만 민주당의 정체성이란 구호가 약간은 바람을 냈다. 앨 고어를 이긴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연임을 하는 동안 민주당내의 브래들리 바람은 조금조금 커져서 강풍으로 변해갔다. 2004년도 ‘하워드 딘’이 그 바람을 탔고 비로소 2008년에 일리노이의 ‘바락 오바마’가 그것을 태풍으로 만들어 백악관을 탈환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의 민주당은 [ 클린턴. 고어. 케리. 힐러리 ]란 계보와 [브래들리. 딘. 오바마]란 계보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후자의 특색은 혈통(집안)의 혜택이 아니고 자본가의 뒷심이 없어 큰돈의 배경이 없다. 인텔리 계층을 포함한 중산층 이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란 당의 중심축을 당 밖의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에게 꼿았다. ‘힐러리 클린턴’은 동네유지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타운 홀 방식을 이어갔지만 오바마는 어디서나 마당에 군중을 동원시켰고 유권자의 주머니를 털었다. 작은 돈을 모금해서 거액의 선거자금을 만들었다. 이것이 풀뿌리의 시대, Grassroots 란 거다.

2001년, 9.11테러가 터진 그 해의 선거에서 아시안이 뉴욕의 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 시의원이다. 그가 중국계의 ‘존 리우’다. 그 이전부터 들고 뛰었지만 한국계의 ‘준 최’는 2005년에 가서야 뉴저지 에디슨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에디슨시에서의 ‘준 최’의 개혁은 오바마 초기 전국적인 모범이 되기도 했다. 뉴욕의 ‘존 리우’나 뉴저지의 ‘준 최’나 2000년 대선전에서 브래들리의 바람을 받았다. ‘준 최’는 브래들리 참모역을 자처하면서 전국을 누비기도 했다. < 2005년 ‘준 최’의 에디슨시장 출마를 알고 당시 일리노이 연방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가 지원유세를 오기까지 했다 >.

뉴욕시의 ‘존 리우’는 4년 임기의 뉴욕시의원을 연임하고 뉴욕시 서열3인 감사원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준 최’는 연임시장을 포기하면서 까지 민주당의 개혁 이미지를 살린다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집착점인 연방의원직을 향한 의지다. 2010년 센서스결과 지역구조정으로 인하여 그의 주거지가 자신의 지역구를 벗어났다.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올 선거에서 뉴욕 주 상원의원에 도전한 ‘존 리우’는 아깝게도 패했지만 당이 필요할 때에 스스럼없이 나섰다는 당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했다. 눈앞도 살피고 길게도 본다는 안목이다.

‘존 리우’의 닮은꼴이 등장했다. 한국계의 뉴욕 주 하원의원 “론 김”이다. ‘존 리우’로부터 사사했지만 그의 스타일은 오히려 ‘존 리우’를 앞서간다. ‘론 김’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신지역인 후러싱의) ‘존 리우’의원의 사무실로 다짜고짜 찾아갔다. 초면이지만 ‘존 리우’도 그를 알아봤고 그도 ‘존 리우’에게서 배울 것을 결심했다. 첫 상면에서 ‘론 김’은 곧장 ‘존 리우’의 보좌관이 되었다. 막 대학을 졸업한 한인청년이 지역현안을 들고 시의원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투지가 있고 이슈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는데 정말 맘에 들었다라고 ‘존 리우’의 말이다. 이 인연이 바로 ‘론 김’의 정치입문이다. ‘론 김’은 바닥을 박박 기었다. 그야말로 시의원 지역구를 발로 뛰면서 현직 의원을 앞서서 현장정치를 스스로 체득했다.

‘론 김’의 의지와 성실함을 지켜보던 뉴욕 주 하원의원 마크 웨프린(Mark Weprin)이 욕심을 냈다. ‘론 김’은 웨프린의 지역담당관으로 일하면서 일반 시민에게 지역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웨프린’의원에게 지역적인 관심사를 정확하게 알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러싱을 발로 누비는 보좌관이란 소문을 듣고 ‘크리스틴 퀸’ 시 의장이 그를 데려갔다. 2006년 ‘론 김’은 뉴욕시 의장실에서 정책분석가로 일하면서 실적을 쌓았다. 2007년 ‘엘리옷 스피쳐’가 주지사가 되면서 ‘론 김’을 발탁해서 올바니로 데려갔다. 자신의 출신지역인 후러싱에 주 하원 자리에 기회가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발 빠르게 의원직에 도전장을 냈다. 2012년 9월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고 그해 11월 본 선거에서 중국계의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뉴욕 주 하원에 입성했다. 뉴욕 주 최초의 한인선출직 의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최초의 뉴욕 주 아시안계 하원의원이다.

‘론 김’의 주 하원 연임 선거가 한 달 앞에 다가왔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한인사회를 포함한 지역사회의 바닥에서 커온 ‘론 김’은 투지와 끈기의 상징이다. 바닥을 박박 기면서 내공을 쌓아온 ‘론 김’의 재선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한인커뮤니티의 변함없는 지지와 지원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여타의 후보들에게 한인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론 김’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야한다. 필자는 ‘론 김’이 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뉴욕의 선출직 의원들을 선도에서 이끌 것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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