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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인종 프로파일링”의 피해자다. -김동석

by kace

미국 경찰의 수사기법 중에 ‘인종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이란 것이 있다. 프로파일링은 정보수집이란 뜻이지만 수사용어로는 현장에서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범인의 습관. 나이. 성격. 직업. 범행수법 등을 추론해 검거하는 기법을 의미한다. 범죄수사를 할 때에 인종을 구분해서 혐의를 판단하곤 하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하고 경찰이 거리에서 흑인들을 일단 범죄자로 간주하고 불심검문을 하거나 흑인이 운전하는 차량을 세우는 일이 이러한 경우다. 9.11 테러 이후 중동의 아랍계들을 테러범으로 의심해서 미국 내 각 공항에서 집중 검색하는 것도 바로 이에 해당한다. 1693년 미국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은 지역 경찰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경찰에게 거리의 모든 흑인을 불심검문하고 영장 없이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인종 프로파일링’의 시초다. 300년 이상 미국 경찰의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 정말로 오랜 세월동안 소수인종을 괴롭혀 온 차별 관행이다. 이것에 관해선 뉴욕경찰(NYPD)이 가장 악명이 높다.

1993년부터 만8년 동안 뉴욕의 줄리아니 시장은 뉴욕시의 범죄율을 줄이기 위해서 뉴욕경찰 공권력 행사에 있어서 ‘무관용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했다. 줄리아니의 경찰정치 성공이후 미 전역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것이 ‘인종적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방식이다. 범죄통계에 나타난 대부분의 강력범죄자들이 10~30대 유색인종 남성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이들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해 ‘예비적인 단속’을 하는 방식으로 범죄율을 줄인 것이다. 뉴욕시 경찰에게 가장 만만한 대상이 2, 30대 흑인이 된 것이 이러한 연유다. 검문에 불응한 흑인 청년이 거리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거나 경찰봉이나 손전등으로 구타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다반사고 급기야는 인종 폭동으로 촉발되기도 했다. 결국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인종적 프로파일링’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제정해 공표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낱개 담배를 불법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은 ‘에릭 가너’는 길거리에서 경찰들에게둘러 쌓였다. 지난 7월에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일이다. 지나가는 행인이 휴대전화로 찍은 동영상을 보면 덩치만 컸지 둔하게 보이는 가너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손짓으로 뭔가 경찰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경찰 중 한명이 그를 뒤쪽으로 접근해서 목을 조르고 그를 넘어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가너는 숨을 쉬기 어렵다고 호소했지만 목조르기는 계속되었고 결국 의식을 잃고 그는 당일 숨졌다. 뉴욕 대배심원은 가너의 목을 졸라서 숨지게 한 백인경찰 ‘판탈레오“경관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뉴욕 대배심원의 이러한 결정이 나오자마자 뉴욕시 타임스퀘어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수일이 지나면서 시위 군중은 불어났다.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내려진 비무장 흑인소년을 살해한 백인경관을 불기소하기로 한 결정에 분노해 있는 전국의 흑인사회에 기름을 뿌렸다. 만 3일이 지나가는데도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미주리주 퍼거슨에 사는 18세의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외할머니 집엘 갔다. 그 소년은 주변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열 살이나 위인 백인경찰이 비무장의 흑인 소년에게 6발의 총탄을 쏴서 실해한 것이다. 지난 8월의 일이다. 소수자에 대한 과잉진압에 분노한 흑인들이 격렬한 시위로 항의했다. 담당 검사는 사건을 카운티의 대배심단에 넘겼다. 대배심원은 거의 4개월 만에 가해자인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배심단의 판단을 지켜보던 흑인들의 분노가 치솓았다. 그들은 화가 나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피해자 가족들과 전국의 흑인대표자들은 검찰의 수사가 경찰위주의 편파적인 수사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특별 검사를 임명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담당검사는 오히려 백인위주로 구성된 배심원에게 결정을 떠 넘겼던 것이다. 시위는 예고되었던 것이고 그것이 과격해 질 것이고 순식간에 폭동으로 변할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퍼거슨시의 화가 난 군중들이 상점을 털고 방화도 서슴치 않았다.

너무나 흡사한 이 두 사건이 20년도 훨씬 지난 그 악몽의 기억. LA폭동을 떠 올리게 한다. 여기서 빨리 아직까지 우리 한인들이 갖고 있는 두 가지의 문제를 꼭 강조해서 되짚고 싶다. 첫째는 고질적인 인종편견이고 그리고 이웃(의 타인종)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다, 아직 한인사회는 소수인종으로써 여타의 소수계들과 더 긴밀하게 협력하고 연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 타 소수계들은 (특히 소수중의 다수인 남미계와 흑인계의 커뮤니티가) 웬지 우리 한인사회를 그렇게 친밀하게 보질 않고 있다. 우리 한인사회를 얄밉게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백인 우월주의를 용인하고 그러한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동네에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다. 타 소수계들이 그렇게 지적을 하고 있다. 교회를 비롯한 어떤 한인들의 종교기관이 마을에 있음에도 동네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이것을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남미계나 흑인사회와 대등한 교류. 연대를 하기 위해서 소수끼리의 정치적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한인들의 정치참여가 그러한 수준에 아직 덜하다.

공권력의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소수계 연대의 시위가 번져나가고 있음에도 아직 한인사회의 지도급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인종차별에 대한 한인사회의 입장과 대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계속해서 침묵이다. 한인사회를 대표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할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한인사회의 리더쉽이 지금 만큼 중요할 때가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한국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할 때의 대표성. 도대체 그 대표는 어디로 갔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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