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초등)학교 6년은 20리 길을, 중학교 3년은 30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한 필자에게 어릴적때의 학교 길은 온통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꼬박 2, 3시간은 걸어야 학교에 닿았고 집으로 돌아 왔으니 통학길의 지겹고 지루함이 아직 기억되는 일은 어쩜 당연하다. 아침저녁으로 걸었던 그 개울길과 산길의 풀과 나뭇가지들, 그리고 신작로의 작고 큰 돌멩이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약30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산속에서 우리 아버지만이 좀 유별났다. 신문 없이는 견디질 못하시는 분이었다. 때문에 통학길이 학교 출석 보다는 늘 신문배달이 우선이었다. 요즘도 신문을 손에 쥐고 살다시피 하는 필자의 습관을 보면 정말로 어릴적의 버릇 여든간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덕분에 누구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일엔 빨랐다.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이 바로 국제정세였다. 지금도 필자는 어느때엔 중동의 정세를 통해서, 어느때엔 유럽통합을 중심으로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는 중국의 영향력 급증을 통해서 재미있게 세계동향을 전망해 본다. 이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옛날 어릴적의 길고 긴 통학 길의 덕분이라 생각한다. 겨우겨우 신문을 소화하기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신선하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국제사회의 이슈는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의 국무장관이 몇 차례 비밀리에 중국을 오갔고 마침내 닉슨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주은래 중국 수상이 미국의 닉슨대통령을 마중하는 북경공항의 사진이 동아일보 전면을 꽉 메운 “ 닉슨대통령이 ‘죽의 장막’ 중국을 가다..! ” 란 주먹크기만한 글자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엔 철천지 원수의 나라 “모택동의 중공”을 어떻게 고맙고 고맙기만 한 미국의 대통령이 거길 갔는지..? 더구나 저렇게 웃으면서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는가..? 에 정말로 충격을 받았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님도, 늘 신문 심부름을 시키던 학교교장선생님인 아버지도, 6학년1반 담임선생님도 ..누구도 필자에게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하질 못했다. 산 너머의 저 하늘 끝의 세상에 직접 나가고야 말겠다는 결심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미국은 일본을 미국의 아시아 전진기지화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란 대륙을 관리하는 데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돈으로 만은 충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일본의 경제를 살려서 일본에게 미국의 대리역할을 맡기기로 전략을 짰다. 경제는 발전시키지만 군사력은 갖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을 짰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미국에 대한 일본의 처치다. 그래서 일본에선 틈만 나면 미국으로 부터의 탈피를 외치다가 권력(총리)이 바뀌곤 했다. 미국의 휘하에서 벗어나려고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일본의 총리가 사토다. 사토는 일본의 총리직에 오르면서 오키나와 반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65년의 일이다. 사토는 미국 추종 노선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의 수상을 세 차례( 61대, 62대, 63대 수상이다 )나 역임했다. ‘사토’는 미국의 발끝에 매달려 있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존슨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서 워싱턴을 방문했다. 존슨대통령과의 회담직후 유명한 연설을 했다 “ 백만명 가까운 일본인이 25년 이상 조국과 떨어져서 타국의 시정권 하에 있다. 하루발리 조국에 복귀하고 싶다는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미국에 왔다 ” 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미국에게 오끼나와 반환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오끼나와를 반환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존슨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고 닉슨이 대통령에 올랐다. 존슨 대통령과 일본과의 관계는 정말로 험악했다. 베트남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존슨대통령의 참전요청에 유독 일본만 질질 시간을 끌면서 소극적이었다. < 한국은 맹호부대를 통해서 증파를 하는데도..> 존슨은 일본에 대해서 속이 탔고 화딱지가 머리끝까지 났다.

 

오끼나와 반환을 놓고서 닉슨과 사토가 팽팽하게 맞설 때에 마침 미국에 예상치 못한 난제가 발생했다. 미국 남부지역이 원산지인 ‘섬유’문제였다. 외국산 섬유수입 규제가 남부 미국에는 사활이 걸린 중대 사안이었다. 닉슨은 1968년 공화당 전국대회에서 외국산 섬유 규제를 공약으로 내 놨다. 그 덕택에 당내 경쟁자인 레이건과 록 펠러를 물리치고 후보 지명전에서 이겼다. 닉슨대통령은 사토와 섬유수출을 자발적으로 규제하는 조건으로 오끼나와 반환(핵무기 반입에 대한..)을 약속하는 밀약을 했다. 밀약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워싱턴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 온 사토수상을 닉슨대통령은 자리에도 앉기 전에 옆방의 미술품을 감상하자고 데리고 나갔다. 참모나 보좌관을 따돌리고 둘만의 밀약을 위해서였다.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낸 닉슨은 사토에게 서명을 요구하고 한 장씩 주머니에 나누어 가졌다. 그 유명한 사토와 닉슨의 밀약이다. 그런데 사토는 오끼나와는 가져가고 섬유수출은 규제하지 않았다. 밀약을 어기고 오리발을 내민 사토에게 닉슨이 극한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그 후, 닉슨의 보복은 일본에겐 아주 처절했다. (미국을 대신해서)중국의 유엔가입 저지를 국제사회에서 도맡아 온 일본을 철저하게 따돌리면서 1972년 2월 닉슨대통령이 마오쩌뚱을 찾아서 북경으로 날아갔다. 일본에겐 안위가 위태할 정도의 왕따다.( 전후 일본은 경제발전이란 측면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미국의 협박이 있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대중국 악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 필자가 강원도 골짜기에서 동아일보를 통해서 닉슨과 마오쩌뚱의 만남에 어안이 벙벙한 지적충격을 받았을 때에 일본은 수상이 물러나야 할 정도의 고통스런 왕따에 시달려야 했음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닉슨의 보복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무역적자의 원흉이었던 일본에 대해서 강한 펀치를 날렸다.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정지시켰다. 달러당 360엔이 308엔으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했다. 오직 수출이 전부였던 일본에게 경제적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닉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중국의 마오쩌뚱을 만났을 때에 센카쿠에 대한 일본의 입장지지를 수정하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사토는 더는 견디질 못하고 1972년 7월 수상직을 사임하게 된다. 미국과 일본의 이러한 관계는 지금까지 유효하다. 일본의 권력은 미국의 콧김에 달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의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해서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고이즈미가 결국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고서야 총리직을 유지했다.

마이니찌신문의 서울특파원이 뉴욕의 필자를 찾아왔다. 2007년 연방하원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에서부터 최근의 기림비를 건립하는 목표와 그 과정을 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란다. 필자는 아주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미국시민임을 분명히 했고 한국의 정부나 시민단체의 보조 역할이 아님을 증명해 보여줬다. 뉴욕과 워싱턴의 한국특파원들이 부지런하게 한국내로 뉴스를 보도했기 때문에 한국인들만의 일로 비추어졌지, 사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지적임을 증명해 보여줬다. 신조 아베 총리가 연일 미국탈피를 꾀하고 있지만 결국 일본은 미국의 지적과 변화의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손으로 일본 전범권력의 뺨을 치는 필자의 전략이 7월21일로 예정된 일본의 참의원 선거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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