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re's nobody more American than that Korean-American guy "

새미 리박사 같은 코리언 어메리칸이 가장 미국인답다.

빼앗긴 들판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고. 일본인 지주의 학대에 못 이겨서 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일본상인의 손에 끌려서 강제로 배를 탔고 수개월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하와이다. 노동자가 필요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주인이 일본인들을 시켜서 한국에서 노동자를 갹출해 왔던 것이다. 1903년 미주한인 이민사의 시작이다. 노동자로 끌려온 사탕수수 이민노동자의 신세는 거의 노예와 다름없었다. 오갈 데 없이 농장 주인한테 잡혀서 혹사당하는 한인노동자들이 일본을 얼마나 미워하고 증오했겠는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서 너 살배기 아들에게 귀가 따갑게 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 한국을 빼앗았고 그리고 우리를 강제로 잡아서 여기에 팽개쳤다. 191931일 한국은 일본과 싸우려고 만세를 불렀고 농장의 한인 이민 노동자들도 만세를 불렀다고 이야기 했다.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노동자의 아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침략과 탄압에 대해서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소년은 다섯 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3.1운동 때 일본군이 수많은 조선 사람을 비참하게 죽였다란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주방용 칼을 들고 일본인이 사는 옆집에 찾아가 당신들을 죽이겠다.”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열 살 무렵엔 전학 온 일본인 학생을 때려 실신시키기도 했다. 1900년대 초 미국으로 와 온갖 차별을 받았던 아버지는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만 사회에서 존중받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들에게 의사가 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아들은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다. 가금씩 들어가 볼 수 있는 수영장이 자신을 이끌고 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소년은 수영선수가 될 것을 결심했다. 수영 중에서도 다이빙이 소년에겐 가장 큰 매력이었다. 백인을 제외하곤 일주일에 꼭 한번만 수영장을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다. 흑인이나 황인종이 수영장엘 다녀간 후에는 수영장의 물을 교체하고 백인들이 사용하는 정도로 차별이 심했다. 이와 같은 극심한 인종차별도 수영과 다이빙을 향한 소년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소년은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수영대회에 꾸준히 참가했고 그리고 유능한 코치를 만나 고된 훈련을 통해서 실력을 쌓았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다이빙 선수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학업성적도 뛰어났다. 그는 동양인 최초로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오히려 다이빙에 열정을 더 쏟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잠시 다이빙을 접고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사가 된 뒤에도 그는 올림픽의 꿈을 접지 않고 틈틈이 다이빙 연습에 몰두했다. 그때에도 여전히 아시안 이라고 수영장 출입은 제한되었고 백인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갈 때에도 제지를 당했다.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 프롬파티에 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소년은 겉으론 유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이를 갈았다. 다이빙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다이빙으로 오히려 차별하는 사람들이 떠받드는 영웅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현실에 분노하기 보다는 올림픽의 금메달을 향해서 질주했다. 오직 연습이었다.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는 미국 다이빙 국가대표 선수로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며 플렛폼 부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스프링보드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아시안계로서는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4년 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 올림픽 다이빙 역사상 최초의 연속 금메달 수상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의 다이빙 영웅 새미 리. 자랑스런 한인2세다.

1964년 동경올림픽 때였다. 당시 새미 리박사는 미국선수단의 코치였고 국제심판이었다. 올림픽 영웅이라는 이유로 각국의 선수단은 그로부터 코치를 받기 원했고 비용도 상당히 비쌌다. ‘새미 리박사는 각국의 요청을 사양했고 거절했다. 특히 개최국인 일본이 그로부터 환심을 사려고 수단 방법을 다 썼지만 나는 한국선수단 이외엔 지도하지 않는다.”며 딱 잘라 말했다. ‘새미 리박사는 미국선수단 보다 이주일이나 먼저 일본으로 와서 자비를 써 가면서 한국선수들과 코치들을 지도했다.

부모님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한국인이라는 본인 스스로의 철저한 정체성이다. ‘새미 리박사는 다이빙 코치의 전설로 통한다. 그로부터의 지도는 금을 낳는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연속해서 금메달을 획득한 그레그 루가니스가 바로 새미 리박사의 제자이다. ‘새미 리박사는 그가 갖고 있는 스포츠계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서 동계올림픽을 평창에 유치토록 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의관으로 자원입대 하여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9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자신의 후배들인 한인2세들을 찾아다니면서 Korean American 이란 정체성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23일자 뉴욕 타임스에 새미 리박사의 사진이 한 면 전체에 실렸다. 타임지는 한국계미국인(Korean American)새미 리를 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이라고 했다. 한국계임을 잊지 않고 미국시민으로 최선을 다해서 미국에 기여한 새미 리만한 미국인다운 미국인은 없다고 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가 Korean American이 가장 미국적이라 한 것 아닌가? 런던 올림픽이 뉴스거리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의 영웅이 한국계 미국인인 새미 리박사다.

매일같이 온 가족이 올림픽의 볼거리로 TV앞에 둘러앉을 텐데… ‘새미 리박사가 이야기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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