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구역설정위원회의 존이고 오른쪽이 구역계획위원회의 아이린이다. 도시계획과는 아무 상관없는 평범한 주민들이다. 이들이 훌륭하게 동네의 도시계획 적용을 토론하고 결정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조언할 뿐 결정은 주민이 한다!

중국에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정부에는 정책이 있고 우리에게는 대책이 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어놓아도 사람들은 그걸 빠져나갈 나름의 대책이 있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중국 정부가 1가구 1자녀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빠져나간다며 이 말을 했다.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지만 중국처럼 큰 나라가 국가 정책을 유들이 없이 적용할 경우 오히려 부작용이 많을 수도 있다는, 따라서 한 치의 차이도 없는 엄격한 적용보다는 처지와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응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미국도 큰 나라다. 주정부가 도시계획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Municipality의 시장과 의회가 도시계획의 마스터 플랜을(10년 단위로 재검토한다.) 세우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런 가이드 라인이나 마스터 플랜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때 Zoning Board(직역하면 구역설정위원회)와 Planning Board(구역계획위원회 정도로 번역할까?)가 나선다.
구역계획위원회는 식당으로 사용되던 상가를 학원으로 바꾼 다든지, 한 가구가 살던 주택을 duplex(한 건물이지만 두개의 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주택)로 다시 짓는다든지 하는 경우에 그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즉 그 용도가 이전과는 상당한 정도로 바뀔 때는 항상 구역계획위원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 또 예를 들어 원래는 관련법에 따라 20개의 주차장을 확보해야 하지만 18개 이상의 주차장이 나오지 않는 경우, 건물의 주인이 “이런저런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니 용인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 검토를 해서 결정해 준다.
구역설정위원회는 좀 더 큰 사안을 다룬다. 관련법이나 마스터 플랜에 따라 4층 이하의 건물을 지어야 하는 구역에서 5층 혹은 6-7층의 건물을 지으려고 할 때, 다른 건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 거리를 확보하지 못할 때 구역설정위원회가 검토한다.
가이드 라인은 주정부가 법률로 정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적용은 개별 Municipality에서 상황에 맞게 결정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구역설정위원회와 구역계획위원회를 통해서 주정부의 가이드 라인을 무시한 난개발을 결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과 같은 경우에 지역개발이란 이름으로 아파트만 지어대는 엉망진창 도시계획이 실제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그게 그렇지 않다.
위원회의 위원들은 재선을 위해 단기간에 지역 개발을 추진하려는 정치인도 아니고, 개발 이익을 얻고 동네를 뜨려고 하는 뜨내기도 아니다. 지역에서 오래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평범한 주민들이다. 그래서 지역의 삶터를 망치는 무분별한 개발에 우호적이지 않다. 주유소 하나를 새로 만드는데도 오랜 토론을 거친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 이미 2개의 주유소가 있는데 왜 또 만들어야 하느냐? 외부 차가 많이 들어와서 아이들만 위험해지는 것 아니냐? 주민들 의견은 물어 보았느냐?
아이린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꽤 오래 전에 팰팍에 3개동의 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이 구역계획위원회를 통해 신청되었다고 한다. 근처 주민들이 반대했고 구역설정위원회와 구역계획위원회도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사안을 쉽게 결정해 주지 않았다. 수도 없는 미팅과 협의 끝에 결국 통과가 되었지만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계획이 많이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합의하는데 1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거참 13년이라니…

그러면 나름 막강 권한을 가진 구역설정위원회와 구역계획위원회의 위원은 누가 할까?
3월18일 팔팍의 구역설정위원회를 대표해서 간담회에 참여한 존은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주민이다. 1960년대에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온 경험도 있다는 그냥 평범한 동네 중노인이다. 구역계획위원회의 의장인 아이린은 고등학교 교사이다. 요즘은 졸업시험 때문에 많이 바쁘지만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기에 학교 끝나고 곧바로 왔단다.
구역설정위원회와 구역계획위원회의 각각 7명 위원들은 모두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평범한 주민들이다. 변호사도 아니고 도시계획 전공자도 아니다. 위원들은 위원회에 소속된 자문 변호사와 도시계획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결정은 주민들이 직접 한다. 동네의 주인은 전문가가 아니라 주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민들 참 착하다. 위임을 잘 한다. 정치인에게 위임하고 관료에게 위임하고 그리고 전문가에게 위임한다. 도봉구청의 도시계획위원회에는 평범한 주민이 없다. 구의원이거나 구청 과장이거나 교수거나 변호사들이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 독하다. 자기 권한과 권리 잘 위임 안한다. 잘 모르면 조언은 듣지만 결정은 자기 스스로 하려고 한다. 우리도 한번 그렇게 해봤으면 좋겠다.

심의 절차는 대체로 이렇다. 저렇게 구역을 설정해 달라, 우리 집을 이렇게 새롭게 짓겠다고 신청서를 작성한 주민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한 달에 한번 열리는 구역설정위원회와 구역계획위원회 회의에 출석해서 제안 설명을 한다. 물론 회의는 공개되며 누구나 청취할 수 있다.
제안 설명을 듣고 나면 위원들이 자문 변호사와 관련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 가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이해관계인이나 주변 주민의 의견이 있으면 회의에 참석하여 혹은 사적으로 피력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자신들의 변호사를 따로 선임하여 위원들을 설득할 수도 있다.
최종 결정은 활발하게 상호 의견을 교환하여 양측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과정을 거쳤다고 판단되었을 때 이뤄진다. 따라서 결정에 불복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는 매우 낮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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