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공공정책위원회 (AIPAC)

미국에서 20여년 이상을 살면서 정치권력에 시민사회가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해 나가는 가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다. 대도시에서 소수중의 소수인 한인동포들을 대표해서 소수계들과 연대하고 이민자단체들을 조직하여 한인들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그러한 노력을 해 오면서 결국에는 결집된 정치력이 없이는 가능한 일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개인의 결론이 아니고 미국사회의 흐름에서 속속들이 나타나는 현상적 실제이다. 미국의 시민사회가 백인 중산층 중심의 보수화쪽으로 빠르게 기울여 흘러가면서 국내문제만이 아니고 외교.안보 정책에서도 소수계. 서민층에게 거의 충격적인 변화를 안겨주고 있다. 소수계 이민자들의 일상이 점점 위축되고 불안한 상황으로 가고있다.

미국내 한국인들은 소수인종이기 때문에 겪는 불이익에 분단국가 출신이라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북한이 미국의 적국으로 간주되어 있는 이상 미국내 한국인들은 생존 자체가 늘 불안한 가운에데 있는 것은 미국의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다.

인권이나 평화. 환경의 NGO들과 함께 소수계의 입장을 함께 외치다가 북한문제가 전면에 부상하면 평화.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엄두를 내질 못한다. 미국의 시민사회에 북한이 미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라는 여론이 팽배되어 있고 그러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이야기 하는 것 조차도 쉽게 미국의 안전과는 상반되는 견해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부인하고 싶은 그렇지만 외면할수 없는 현실이다.

미국과 한국간의 관계를 늘 좋게 만들어 가는 일은 미국내 한국인들의 숙명적인 과제다. 한국의 대미외교에서 한국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을 일치시켜 나가는 정책과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한인동포들은 미국의 핵심인 워싱턴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깊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과거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거의 일치할 때에는 한국의 대미외교가 별로 할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통사정 구걸, 100% 주고받기식 외교방식 이외에는 별 다른 방도를 갖고있지 못한 한국의 대미외교력 갖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반 없는 상황이다.

21세기 역시 세계는 미국의 손안에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와 역할은 미국관계가 시작이고 끝이다. 따라서 한국과 나아가서 한민족의 미래는 이제는 미주동포의 손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바로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은 21세기 미주동포들의 운명적 과제이다.

AIPAC 은 이와같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좋은 전략적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미국내 유태인들의 친이스라엘 로비활동: 애이팩 (AIPAC American-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

50년의 성과

1999년 4월 워싱턴에서는 이스라엘 로비단체인 애이팩의 50주년 기념행사 및 연례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틀간 열린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은 애이팩의 지난 50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첫날 행사의 키노트연사로는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이 나왔다. 고어는 당시 애이팩 회장의 예일대학교 동창으로 개인적 친분도 유지하고 있었다. 곧 이어 있은 만찬에는 이 행사를 위해 워싱턴을 찾은 애이팩 회원들이자 지역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수십명의 상,하원의 의원들로 붐볐다.

행사 두번째 날에는 이제 막 하원의장에 선출된 데니스 해스터 의원과 민주당 원내총무 딕 게파트 의원이 차례로 축하연설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가지의 행사가 벌어지는 워싱턴에서 현역의원을 초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애이팩의 부름()에 달려온 이들 의원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형식적인 행사 참석이 아니라 연설의 내용도 애이팩이 원하는 것을 들려주기로 작심한 듯했고 개별적 만남에서도 애이팩 간부들에 관해서는 개개인의 가족과 최근 근황까지도 꿰뚫고 있어 상호 친분 정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의 구체적 영향력은 의원들과의 개별접촉을 통한 로비에서 확인되었다. 이른 아침 열린 지도부만이 참석한 비공개 로비준비 회의에서 첫번째로 이들은 선거를 앞두고 분석한 자료들을 배포하고 이번 선거를 전망하는 순서를 가졌다.

이 분석 책자를 살펴 보면 상원과 하원의 지역구별 선거를 나누어 지난 결과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진행과정과 전망, 예측 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현역의원들의 경우는 당선 가능성과 함께 이스라엘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된 법안에 대한 투표결과를 토대로 우호와 적대 그리고 중간으로 구분하여 다루고 있었다.

동시에 출마 후보군은 물론이고 아직 출마자가 결정되지 않은 지역에도 예상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들의 성향과 가능성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구도뿐만 아니라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까지 상정해 선거구도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번 행사에 참석한 회원들 중 의원들과 개별적 친분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분류해 그 의원들의 해당 지역구에서 온 회원들과 팀을 이루는 분류작업을 끝낸 리스트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는 의원들을 방문해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전달해야하는 메시지 등을 각 팀의 팀장들에게 강의했다.

특수관계

이들을 시민로비단이 의회를 방문해 의원들과 가진 개별면담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세가지로 압축됐다.

1. 지금까지 이스라엘 우호정책에 감사드린다.

2. 중동평화협상에서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에 양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3. 이스라엘의 지원금을 삭감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듣기에 따라서는 단순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것 같은 메시지의 속 뜻을 풀어 놓고 보면 거기에는 구체적인 거래가 담겨있는 것이다.

즉 이 메시지는

1.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정책만큼 우리 회원들은 앞으로도 확실한 정치적 후원을 통해 보답할 것이다.

2. 중동평화협상에서 예루살렘 포기 내용이 포함되는 행정부나 의회의 시도가 있을 경우 분명한 반대의사를 나타내야 한다.

3. 다른 모든 나라들의 지원 예산 삭감 결정이 이스라엘의 예산지원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왜 이스라엘은 미국에게 특별하기 때문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언뜻 들으면 간단한 것 같지만 이는 실로 무거운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만났던 의원들 중 애이팩이 요구한 이 세가지 메시지를 거부한 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민로비단은 한 팀당 하원 한두 명을 개별 면담했고 상원의 경우는 한 주를 대표하는 관계로 여러 팀이 한자리에 모여 면담을 가졌다. 또 해당 지역구 의원은 아니나 대 이스라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국방위원회, 예산위원회, 외교위원회의 전문위원들이 따로 시간을 내어서 이스라엘과 관련된 해당 정책을 브리핑해 주었다.

미국의 유태인

한국인들에게 미국내 유태인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약소국가로서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모든 현상을 음모론에 입각해서 해석할 때 한층 힘을 받는다.

미국을 사실상 뒤에서 주도하는 것은 유태인들이며 모든 풀리지 않는 정치적 의혹에는 그 뒤에 유태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2000년 미대통령 선거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죠셉 리버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을 때 한국과 미국에서의 해석은 조금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 한국의 분석가들은유태인인 리버먼을 지명한 결정은 고어의 최고의 선택이고 미국의 주요언론이 이제 앞장서서 리버먼 부통령 만들기에 앞장설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심지어 어떤 인사들은 유태인들이 단결할 테니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라고까지 얘기했다.

만약 전체득표수에서 고어가 아닌 부시가 승리했고 선거인단에서 부시가 아닌 고어가 승리했을 때 대법원이 마지막에 고어의 손을 들어주었다면(실제로는 그 반대였지만) 이런 류의 음모론은 다시 한번 힘을 얻었을 것이고 ‘유태인의 미국 지배설’은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와 달랐다. 더욱이 당시 리버먼의 지명에 대해 워싱턴의 정치권에서는 리버먼이 그가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고어가 리버먼을 선택한 것은 클린턴의 성스캔들 당시 민주당에서 가장 먼저 의회단상에서 공개적으로 클린턴을 비난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어의 차별화전략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인물이란 점과 동시에 부통령 후보군 중 가장 보수적인 리버먼을 선택함으로써 포퓰리즘에 의존한 진보적 정치에 치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고어가 마지막까지 고민한 부분은 그가 유태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그의 선택은 8년 먼데일이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부통령이라는 수를 던졌던 상황과는 다른 것이다. 당시 제랄딘 페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단점이 있음에도 부통령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유태인 사회 지도자들은 리버먼의 지명에 찬반 의견이 갈리는 현상을 보였다. 일부는 유태인 사회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제 유태인 출신도 백악관 자리를 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전체 인구에서 3%에 불과한 유태인들의 지나친 두드러짐은 미국내의 뿌리깊은 반유태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며 우려했다.

미국내 유태인이 사회 곳곳에 보여주는 영향력은 실로 크다. 그들은 특히 3%에 불과한 인구비에 비해 대단히 많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특히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의 유태인 선출직 의원 비율은 자신들의 인구비의 몇배에 달한다.

한 예로 연방상원의 유태계 비율은 이제 10%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특히 반유태적 분위기나 반이스라엘적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의 대표적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가 헐리우드를 유태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발언을 한 후 48시간이 못되어 눈물을 흘리며 사과회견을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아시아의 유태인

유태인 1세대들의 근면과 성실을 통한 자영업의 성공과 학벌 위주의 엄격한 자녀교육은 2003년으로 이민 100년을 맞는 한인들에게는 모범의 대상이 되어왔고 대다수 한인들은 ‘아시아의 유태인’이라고 불려지는 데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한인들도 유태인 못지 않게 박사, 변호사, 의사들을 배출해 내고 있고, 1세대들은 미국의 이질적인 문화와 사회분위기 속에서 근면과 성실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내의 한인들은 ‘아시아의 유태인’으로 불리우기에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미국 내의 유태인이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의식과 정치참여의식을 미국 내의 한국인들에게서는 아직 발견하기 어렵다. 미국 내 유태인 사회가 오늘날 발휘하고 있는 영향력은 단순한 1세대의 경제적 성장과 그 다음 세대의 고학력을 통한 전문직 진출을 통해서 이뤄진 것만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의 결과를 사회로 환원하는 기부금 문화와 전문직 진출을 발판삼아 유태 사회의 전체 이익에 부합하는 각종 정치, 사회적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 내 한인 사회가 보여온 개인 혹은 가족 중심적이고 사회참여에 무관심한 듯한 모습은 한국인의 역사와 환경에서 기인하는 점도 있지만, 이는 한국의 정치나 정부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과 이념적 갈등이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어 한인 사회 내부의 갈등과 반목으로 재현되고 있거니와, 한국에서 수십년간 군사정권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 내 한인들은 스스로 국가나 민족 공동체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상황이 변화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한인 사회의 에너지를 공동체적인 목표 속에 결집시켜 내기 보다는 개별 정치인 중심의 편가르기에 쏠리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속에서 대다수 한인들에게 정치적 참여나 공동체적인 활동은 크게 환영 받지 못하는 영역이 되어 가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이후 10여년간 장기적 안목을 갖고 미국 내 한인사회와의 관계를 모색하고 국가적 이익에 맞게 한인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으며, 언어에서나 전문가로서의 자격 면에서 워싱턴 등지에서 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2세들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동기와 역할을 부여해 주는 노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정치인이나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미국 내 한인들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찾아 보기 어려우며, 당연히 미국 내 한인들의 에너지를 공동체적인 목표에 따라 묶어내려는 구체적 청사진도 제시된 적이 없다.

민주화 이후 10여년, 이제 누가 미국 내에서 한국을 위해 말할 것인가 누가 미국 내에서 한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답이 필요한 때이다. 한국과 한국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한미관계의 진행 과정에서 무언가 기댈 언덕을 만들 자산이 우리에겐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미국 내 유태인 사회의 자발적 사회참여와 기부문화는 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악몽과 아직도 전쟁의 위험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모국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기인한다. 이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와 비교할 때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 내 한인사회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미국 내의 유태인들이 워싱턴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를 벤치마킹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국 내의 3%밖에 안되는 유태인들이 미국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유태인 사회가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유태인 사회의 진정한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반성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대사관과 애이팩 중 하나를 택하라면 이스라엘 정부는 주저하지 않고 애이팩을 택할 것이라는 게 워싱턴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스라엘 정책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데 이스라엘 대사관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애이택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모든 시작에는 계기가 있듯이, 이들의 첫걸음은 홀로코스트의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대전과정에서 유태인의 대량학살에 관한 사실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미국내 유태인들은 깊은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만약 자신들이 미국 시민으로 정치에 집단적으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조금이라도 정부에 영향력이 있었다면 미국의 2차대전 개입을 좀더 앞당길 수 있었고 이는 유태인의 대량학살을 불러온 홀로코스트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감이 미국 내 유태인사회를 강하게 지배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이제 대전 이후 막 첫걸음을 뗀 신생국 이스라엘이 주변의 아랍국가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한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돕도록, 워싱턴이 친이스라엘적 정책을 수립하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그를 위해 조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유태인인 몇몇 학자, 변호사, 활동가, 사업가들이 워싱턴에 모여 애이팩을 결성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사무실은 워싱턴과 유태인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과 LA 등에 만들고 몇몇 사업가들의 기부로 기금을 충당하고 변호사나 정당의 활동가들이 애이팩의 업무를 전담하며 상근하게 된다.

그러나 워싱턴 내 최고의 로비력을 자랑하는 애이팩의 결성이 처음부터 그렇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친이스라엘 로비단체의 결성 소식을 전해 들은 미 정부는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한다.

특히 국무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중동에 아랍계 여러 국가가 있는데, 중동의 한 작은 국가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로비단체가 만들어진다면 이는 아랍계를 자극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중동정책이 아랍권에 불리하게 보일 경우 친이스라엘 단체의 로비 때문이라는 모함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미 정부 관리들을 자신들의 인맥을 동원해 애이팩 핵심 참여자들에게 이러한 단체의 결성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에서 반유태 정서의 실제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태인들로서는 미국이 알아서 잘 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모험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입장이 있었다.

스스로 돕지 않으면 아무도 돕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을 단호하게 만든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 1949년 4월 애이팩은 워싱턴에서 최초로 친이스라엘 로비활동을 표방하면서 미국시민 로비의 문을 열었다.

 

애이팩 1기 

49년 창립에서부터 70년대까지 30년간의 애이팩의 활동은 순조로왔다. 무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모두 성과였고 친이스라엘 의원이 한 사람씩 늘어나는 것도 큰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전통적으로 정치, 사회 활동에 대한 후원에 인색하지 않은 유태인들은 회원수가 수만명 단위로 늘어나면서 소수 독지가에 의존하던 예산을 일반 회원 중심으로 확대해 나갔다.

뉴욕, LA는 물론이고 플로리다, 펜실베니아, 매사츄세츠 주 등에 사무실을 열고 그 지역 의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 나갔다. 이때를 이들은 애이팩 1기라고 부른다. 당시 애이팩의 주요 타겟은 유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의원들이었고, 특히 이들 중 중동외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수 의원들이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영향력은 북동부, 중서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6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는 애이팩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민주당에 가까웠다. 반유태계적 정서가 공공연하고 민권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에 보수성향의 공화당의원이나 남부 지역을 대상으로 로비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상대방들도 이들을 반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애이팩은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워싱턴을 중심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애이팩의 이러한 순항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시험

공산권의 힘이 중동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사우디에 미군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고 사우디의 정찰기 도입 요청을 승인한다. 이때가 카터 정부 당시인 70년대 후반이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발발하자 사우디는 이번엔 탱크, 비행기 등을 포함하여 당시 84억달러 규모의 무기 구입을 희망해 왔다.

1980년 선거 막바지에 카터는 이러한 결정이 민주당 내 주요 기반인 유태계의 반발 등 악재로 작용할 것을 우려했지만, 군부의 설득으로 결국 이 요청을 승인한다. 80년 선거 결과 백악관의 주인이 된 공화당의 레이건은 감세정책 등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얻고 이에 힘입어 사우디 무기 판매 건을 의회에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은 개인서한 등을 통해 레이건을 설득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이스라엘 정부의 미의회 접촉과 같은 정부 차원의 로비나 이스라엘 선거를 앞두고 감행한 이라크 핵 시설 폭격은 백악관을 자극하는 역효과만을 불러왔다. 이스라엘 정부가 나설수록 일은 점점 꼬여만 가는 것 같았다.

이제 이스라엘의 마지막 희망은 유태계 미국 시민들이 주도하는 애이팩이라는 또 하나의 대사관에 달려 있었다.

애이팩은 이스라엘 정부와는 별개로 발빠르게 움직였다. 30년 이상의 노력과 경험이 사우디 무기 판매 건에 모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이팩은 행정부와 상원을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해 공화당에서 유태인들과 가까운 오레건 주의 팩우드 의원을 내세워 상원을 결집시키기로 했다.

하원은 민주당이 다수인데다 그동안 캘리포니아, 뉴욕, 플로리다 등 유태인들이 많은 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한 보람으로 어렵지 않게 의원 다수에게서 대사우디 무기수출 반대 서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상원 54명과 하원 224명이 레이건의 결정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정부의 무기판매에 대해 다른 나라의 안보를 이유로 과반 이상의 의원들이 반대의견에 서명을 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최근 한미간에 논의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재배치나 북핵문제에 대한 추가적 조치 문제 등에 관해 한국측 의견을 지지하는 의회 결의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군산복합체와의 대결

정계은퇴 뒤 주일대사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당시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였던 하워드 베이커는 레이건에게 하원은 물론이고 상원도 통과를 낙관할 수 없다며 유보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하원은 결국 301대 11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이 무기수출안을 부결시킨다.

취임 첫해 상승세를 타던 레이건은 이에 굴복할 수 없었다. 특히 군사복합체들과 직간접적 연관이 있던 각료들과 참모진은 애이팩의 로비와 의회의 반응에 분노했고 반격작전에 돌입했다. 군수복합체는 물론이고 미국내 대기업들도 이에 가세했다. 애이팩의 로비를 이번 기회에 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로비를 위한 연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여하며 의원들을 포섭해 갔고,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해 나갔다. 레이건의 참모들은 선거캠페인을 하듯 언론을 활용하며 여론을 레이건 쪽으로 몰아갔고 기업들의 로비 앞에서 의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이건의 여론조사가인 리차드 워스린은 여론동향을 점검하며 레이건의 대국민 메시지를 다듬었고 이미지메이커 디버는 이 법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레이건의 각종 미디어 이벤트를 기획했다.

의회는 당시 비서실장이던 제임스 베이커가 전담했다. 베이커는 무기판매 찬성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는 의원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레이건에게 건냈고 레이건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면담하면서 설득했다. 하워드 베이커 상원 원내총무는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자 주저없이 표결에 붙였다. 찬성 52, 반대 48. 행정부, 아니 군수복합체의 승리였다.

애이팩은 창립 이래 가장 뼈아픈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30년간 공들인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듯 했다. 처음에 반대 서명에 약속했던 6명의 의원들이 이탈한 것이었다. 애이팩 지도부는 이에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애이팩은 48년 창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애이팩 2기: 풀뿌리 로비 

누구나 실패를 경험한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가 주저앉는가의 차이라고 했던가 모국 이스라엘의 상황은 애이팩이 패자로 남아있는 사치를 누릴 수 없게끔 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애이팩의 지난 활동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반성했다.

이들은 각종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의원들 다수표를 확보하는데 54명은 너무 불안한 숫자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결국 5명만 이탈하고 나면 나머지49명의 지지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고, 그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들은 애이팩이 유태인의 영향력이 높고 유태인 사회가 자리를 잡은 편안한 지역에만 안주했고 외교를 주도하는 상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변화를 보였음에도 너무 민주당 편향의 활동을 보여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은 워싱턴 중심의 로비에서 탈피해 지역으로 파고들어 풀뿌리 로비를 통해 워싱턴을 움직이기로 새로운 방향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체계적 준비와 대대적 자금모금에 들어간다. 2기 지도부의 목표가 설정된 것이다. 애이팩은 남부지역 등에 연고가 있는 회원들을 찾았고 텍사스 등에 사무실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정착이 쉽지 않았으나 그들의 체계적인 활동은 곧 그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30년간의 활동 노하우와 그간의 인맥은 새로운 곳에서도 진가를 인정받았다.

애이팩의 반격 군사복합체와의 재격돌

절치부심 그들이 당한 수모를 설욕하고 몇년간 강화된 로비력을 시험할 기회가 레이건 정부 2기 첫해인 1985년에 찾아왔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15억달러의 무기구입을 미 정부에 희망해 왔다. 50개주 가운데 49개주를 석권하며 재선에 성공한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에 이를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애이팩은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아직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 논란을 벌일 사이도 없이 신속하게 74명의 상원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100명 상원의 2/3가 넘고 81년 사우디 무기수출 건 당시와 비교해 20명이 늘어난 숫자였다.

백악관은 최소한 24명의 상원의 마음을 돌려야만 50대 50의 동수가 되어 헌법이 보장한 부통령의 투표를 통해 법안을 통과시킬 수가 있었다. 양적 증가는 분명 질적 증가도 가져 왔다. 서명 의원들의 이번 법안에 대한 입장은 완고했고 각종 회유와 협박에도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백악관은 고민 끝에 결국 의회승인 요청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무리한 표결 강행이 패배로 돌아올 경우 레이건 2기 출발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곧바로 이어진 사우디의 30억달러에 달하는 추가 무기구매 희망도 애이팩이라는 장벽을 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 부시 행정부에서 할리버턴과 같은 위치를 누렸던 군사복합체의 대표적 기업인 벡텔 등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친이스라엘 연대는 철옹성과 같았다. 벡텔은 당시 국무장관인 죠지 슐츠가 회장을 지냈고 국방장관인 케스퍼 와인버거가 책임변호사를 맡았던 기업으로 걸프지역의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고 있었다. 결국 슐츠를 중심으로 한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와 애이팩을 설득한 끝에 사우디가 요청한 당초의 1/10에도 못 미치는 금액의 무기를 판매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기에 이르렀다. 워싱턴에 집중되어 있는 군사복합체 로비스트들은 의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탄탄하게 다져진 애이팩의 로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파워

애이팩에 대해 비판적인 워싱턴의 관계자들은 이 이후로 미국 행정부는 아랍권의 무기판매나 중동평화협상에 있어 애이팩과 사전회담을 통해 의견 조율을 거친 후 이런 문제들을 추진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또한 의회에서 올라오는 친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중동문제 결의안의 초안은 사실상 애이팩이 초안을 쓰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같은 비판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애이팩에 비판을 가했다가 희생양이 된 예로 핀들리 의원을 언급한다.

일리노이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폴 핀들리 공화당 의원은 외교위원회에서 반이스라엘 정치인으로 지목되어 낙선운동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 하원선거라고 보기엔 엄청난 선거자금이 사용된 선거에서 결국 낙선하게 된다.

이러한 엄청난 자금이 동원된 것은 그를 낙선시키려는 친이스라엘 세력과 핀들리를 지키려는 반이스라엘 세력의 대리전으로 치러진 선거에 양쪽에서 엄청난 선거자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패배는 애이팩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핀들리는 의원일 당시 공개적으로 친이스라엘 로비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인물이었고 팔레스타인 정부 수반과 두 차례 회동하기도 했으니 애이팩으로서 곱게 볼 리가 없었다.

핀들리는 낙선 뒤 저술한 책, ‘They dare to speak out’ 에서 애이팩은 심지어 의원들끼리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까지 모니터해서 반이스라엘적인 발언이 있을 경우 이를 추궁한다고 비판했다.

애이팩은 로비단체로 등록되어 있어 정치후원금을 줄 수도 없고 의원들에게 어떠한 접대나 여행 주선 등도 금지되어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럴 경우 이는 외국 국가 에이전트로 인정되며 시민로비와는 다른 또다른 법적 절차와 등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애이팩에는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십만명에 가까운 유태계 회원들이 전국에 퍼져 있다. 애이팩과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사실상 보조를 같이 하는 이스라엘 교육재단과 친이스라엘계 정치 후원단체들은 애이팩의 로비를 원활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무기이다.

이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애이팩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정치인 후원이나 이스라엘 초청 교류 같은 활동은 이들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애이팩의 이사로 활동 중인 한 인사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모자를 바꿔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민간 단체의 활동과 후원을 통해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 문제에 낯설었던 의원들을 친이스라엘 쪽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교육재단은 미국 내 주요 인사와 앞으로 성장 가능한 지도자들을 지목해 이들에게 이스라엘 여행을 주선하고 교류를 증진시킨다.

이스라엘 초청 교류 효과는 97년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쿠데타로까지 불리며 40년만에 하원을 장악했던 뉴트 깅그리치 의장이 불과 3년만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그 뒤를 이어 의장으로 지목된 밥 리빙스턴이 갑작스레 터져 나온 스캔들로 의장 선출 며칠만에 자리를 물러나야 했을 때 워싱턴의 이익집단들은 예측할 수 없는 하원의 리더십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공화당이 일리노이 출신의 과묵한 거구 데니스 해스터 의원을 하원의장 카드로 내놓았을 때 많은 로비단체들은 그가 누구인지 또 누구와 가깝고 어떤 성향인지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애이팩만은 예외였다. 해스터 의원의 의장 선출 소식을 접한 애이팩의 지도부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의장 선출전 10년간 이스라엘 교육재단 주선으로 10번 이상 이스라엘을 방문한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1999년 애이팩의 50주년 행사 오찬 연설에서 이스라엘과 자신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친이스라엘 정치자금 후원단체들은 선거를 앞두고 항상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이들의 정치후원에는 분명한 규칙이 있다. 우선 친이스라엘 현역의원을 지원한다.

여기엔 공화, 민주의 당파적 구분의 의미가 없다. 심지어 애이팩 활동을 했던 유태계 출신이 보수파 공화당 의원에 도전장을 던진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애이팩 지도부의 한 간부는 이를 이렇게 얘기한다. “신뢰가 중요하다. 우리는 의원들에게 당신이 만약 이번 투표에서 우리의 의견을 따라준다면 다음 선거에서 우리 형제나 부모가 당신 지역구에서 출마한다 해도 당신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으며,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할 때 의원들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친이스라엘 정치인이 유태계의 도전을 받아 고전할 경우 유태계의 덕망 있는 인물을 이 정치인의 후원회장으로 내세워 유태계에서 선거자금을 모으는데 앞장서게끔 한다. 때론 이들은 유태계 의원들을 주저 앉히는 역할도 한다.

86년 유태계 의원인 론 와이든 하원의원은 공화당의 밥 팩우드 상원의원에게 상원 도전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이팩은 와이든 의원을 설득해 상원 도전을 포기시켰다. 팩우드 의원은 어려울 때 이스라엘의 친구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밥 돌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의 경우도 조금 다르지만, 유태계의 도움을 받게 된다. 돌 의원을 이길 수 없는 인물이 유태계의 지지를 받아 돌 의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 유태인들의 영향력이나 활동반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장차 미래를 내다보고, 미주 한인사회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지난 10년 사이 한인 사회의 미국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서서히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다른 이민사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기초적인 수준이다.

더욱이 과거의 활동경력이나 이슈를 따지기 보다는 한국인은 무조건 한국인에게 투표해야 한다는 투표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럴 경우 한인사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하나는 세력이 미비한 한인들은 한인표만으론 후보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한인들끼리 똘똘 뭉쳐 한인 후보를 무조건 지원하면, 오히려 고립을 가져올 수 있다.

두번째는 한인 사회의 이런 태도가 계속되면 미국의 어느 정치인도 선뜻 한인사회를 위해 앞장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갑자기 한인 후보가 등장할 경우 한국인들은 똘똘 뭉쳐 그 한인을 지지하게 될 테니 말이다. 세번째는 자격이 안 되는 후보를 한인사회 얼굴로 내보내 한인사회 전체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극보수 의원이며 외교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시 헬름즈 상원의원과의 관계는 애이팩의 치밀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애이팩은 헬름즈가 애이팩의 활동이나 이스라엘 정책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음을 판단하고 헬름즈를 설득하기 위한 로비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는 헬름즈 의원의 완강함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 다음 애이팩은 노스캘롤라이나 84년 선거구도를 분석한 결과 다음 선거에서 헬름즈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민주당 후보의 지원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그 역시 실패하고 만다.

애이팩은 헬름즈가 좋던 싫던 상원외교위원장으로 외교정책에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교육단체를 통해 헬름즈를 이스라엘로 자주 초청해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직접 보고 그와 성향이 맞는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어나가게 하면서 최소한 그를 중도적 입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성과가 있었고 정계은퇴 전까지 헬름즈는 차츰차츰 변화했고 이스라엘 정책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성공요인

포춘지 등이 선정하는 워싱턴 파워로비 그룹 가운데 5위권 밖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애이팩의 성공 요인은 몇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번째로 애이팩은 이스라엘 정부를 대표하는 외국 에이전트로 등록하는 대신 미국 시민권자로 이루어진 국내 로비단체로 등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민으로서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요구한다는것이며, 외국 정부가 요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당성과 영향력을 가진다. 특히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권 국가들이나 국제사회는 이스라엘 정부의 로비가 아닌 미국민의 로비를 대놓고 비난할 수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두번째로는 유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들 수 있다. 현재 애이팩의 회원은 10만이 넘는다. 워싱턴을 본부로 두었지만 지역 곳곳에 사무실을 두고 회원들이 선거에 가담해서 ‘애이팩’의 확실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애이팩이 친이스라엘 정치인으로 분류한 의원들의 당선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마다하지 않고 정치후원금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유태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까지 설득해 그 의원을 지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뉴욕의 정치인들은 이들이 1천 표를 약속하면 2천표를 몰고 오고 1만 달러를 약속하면 2만 달러를 모금해 오는 등 항상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 준다고 이들의 공헌도를 극찬한다.

정치인들은 이익집단을 볼 때 딱 두 가지만 본다고 한다. 투표와 선거 자금이다. 그 집단이 나에게 얼마나 표를 모아줄 수 있는지, 얼만큼의 정치 후원금을 줄 수 있는 지가 그들의 영향력을 결정짓는 것이다.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유권자 등록을 하지 않아 투표율이 높지 않고, 후원금을 내는데도 인색하다면 그 이익집단이나 소수민족의 얘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뉴욕시 의회 의장이 차이나타운의 음력설 잔치에 참석하자는 보좌진의 권유를 받고 그 사람들은 투표도 하지 않고 후원금도 내지 않는데 왜 시간을 낭비하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냉정한 현실정치에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워싱턴의 정치인에게서 도움을 받으려면 스스로를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애이팩 운영을 위한 기부금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애이팩은 로비단체인 이상 어떤 정부 기금은 물론이고 재단 등의 기금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오직 이 로비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후원금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후원금이 연간 1천만 달러가 넘는다.

애이팩의 열성 회원은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애이팩이 1년에 1천만달러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다. 우리가 1년에 몇백 달러, 몇천 달러를 기부해서 애이팩이 운영될 수 있고 이러한 기금을 통해 이스라엘에 원조가 몇십억 달러 더 가고, 아랍의 무기수출을 제한하고, 중동평화회담에서 이스라엘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반영하게 만든다면 애이팩이 1년예산을 몇백만 달러 더 늘린다 해도 우리는 불평 없이 우리의 기부금을 늘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내 유태인들의 이스라엘과의 꾸준한 관계를 통한 정체성의 유지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세대가 바뀌어도 애이팩에 계속 젊은 활동가들이 영입되고 회원들이 줄지 않고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이스라엘은 이중국적을 통해 미국에서 태어난 2세, 3세가 이스라엘과 계속해서 연대를 가지도록 하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 2세, 3세들도 부모들을 따라 각종 수련회에 참가하고 대학생 때에는 단기간 군사훈련도 받고 돌아온다. 클린턴의 측근 참모이며 지금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한 램 앰마뉴엘은 이러한 수련회와 군사훈련을 거친 전형적 유태인이다.

아직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아시안계, 특히 한인이 그랬다면 백악관 근무는 어림없는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사회도 이제는 유태인들의 이스라엘과의 이러한 긴밀한 관계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유태인 부모들은 미국서 자라나는 세대를 청소년기부터 반 의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공부시키고 이스라엘로 장기 여행을 보내고 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고 모국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애이팩 3기: 새로운 도전 

애이팩은 현재의 위치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학교 캠퍼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도부는 현재 젊은 세대들이 점점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도 엷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학생 때부터 이러한 문제를 교육시키고 이들을 후원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80년대 패배의 교훈은 일이 벌어지고 그때 가서 다급해 하기 보다는 미리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준비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애이팩의 목표를 반영하듯 50주년 행사 이후 매년 애이팩 행사에는 미 전국의 대학교에서 온 학생그룹 수백명이 따로 자리를 잡고 행사에 참석했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행사도 준비되어 있었다.

애이팩은 이스라엘 정부와 직접적 관계는 전혀 없다고 말하지만 워싱턴에서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이는 없다. 다만 아무도 얘기하지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뿐이다.

애이팩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도 사무실을 두고 있다. 애이팩의 원칙 중 하나는 아무리 이견이 있어도 이스라엘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경우 이스라엘로 날아가서 비공개로 푼다는 것이다.

애이팩 지도부의 대화상대는 외무장관이고 종종 수상과 독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애이팩의 역할과 영향력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민주당의 진보진영과 공화당의 극우진영에서는 공개적으로 비판의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알려진 바와 같이 애이팩이 모든 로비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나친 로비가 역효과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앞으로도 애이팩의 로비는 계속해서 다른 로비단체들의 견제와 경쟁을 맞게 될 것이다. 군사복합체는 물론이고 아랍계 시민권자들도 애이팩을 본받아 아랍계 미국인 연맹을 창립해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워싱턴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에게 알려져 있는 아랍이나 이슬람교도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론조사 회사 등을 통해 자세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5년간 애이팩이 보여준 것처럼 한발 앞서 변화하고 대응하는 모습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다른 로비단체가 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동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세계 마지막 냉전지대인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워싱턴의 강경파의 목소리가 한국을 좌지우지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모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유태인들의 용의주도한 활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돕지 않으면 아무도 돕지 않는다.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한민족의 과제이며, 이를 풀어가는 데 국내외 민족적 에너지를 잘 모으고 활용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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